▲ 남산골한옥마을을 찾은 시민들은 소원쓰기로 한 해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 다양한 체험행사에 참여했다.

입춘 맞은 남산골한옥마을

지난달 폭설과 한파로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던 맹추위는 4일 입춘을 기점으로 한풀 꺾였다. 사람들은 "입춘은 속일 수가 없다"며 입을 모았다. 24절기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입춘은 봄을 알리는 전령사처럼 그렇게 소리 없이 찾아왔다.

농경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24절기와 세시풍속은 우리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입춘은 이날로부터 봄이 시작된다고 하여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각 가정에 입춘축(立春祝)을 써서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여 한 해의 풍작과 건강, 만복을 기원했다.

지난 4일에는 전국에서 입춘행사가 열렸다. 서울 중구 남산골한옥마을에는 국내외 많은 방문객들이 모여들어 낮 12시부터 시작된 입춘첩 붙이기 시연, 연희그룹 '유희'의 풍물공연, 오신반(五辛盤) 시식, 소원쓰기, 입춘첩 받아가기 등 체험행사에 참여했다. 이중 입춘절식이라 불리는 오신반은 맵고 자극적인 나물과 함께 비벼 먹는 밥을 뜻한다. 오신반은 추운 겨울을 이겨낸 다섯 가지 매운 야채를 먹으면서 겨우내 부족한 생기를 채우라는 뜻이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경기도 산골지방의 육읍(양근·지평·포천·가평·삭녕·연천)에서는 총아(움파), 산개, 신감채 등 햇나물을 눈 밑에서 캐내어 임금에게 진상했다"고 밝혀져 있다.

이날 남산골한옥마을에서는 오신반 무료시식 외에도 두릅초회, 보리순, 파강회, 움파산적, 탕평채를 전시해 세시풍속을 잇는 전통음식을 선보였다. 당일 200인분의 오신반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눔을 펼친 전통음식연구원 정금미 원장은 "추위를 뚫고 자란 채소들이기 때문에 그 생명력이 강하다. 오신반을 시식한 많은 시민들이 한 해 건강을 잘 유지하여 행복하기를 축원한다"며 행사 참여의 뜻을 전했다.

오신반 시식코너 옆에서는 2명의 훈장이 입춘첩을 써서 시민들에게 나눴다. 이들은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입춘이 되니 크게 길할 것이요, 따스한 기운이 되니 경사가 많으리라)',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땅을 쓰니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여니 만복이 나온다)'의 글귀로 새해 첫 출발의 희망을 선물했다.

남산골한옥마을의 '반가운 시작, 입춘' 행사는 오후 3시까지 이어져,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봄 햇살만큼 시민들의 표정도 따스한 봄기운이 맴돌았다.

▲ 다섯 가지 매운 야채를 비벼 만드는 오신반 재료들.
▲ 4일 남산골한옥마을은 오후 12시부터 3시까지 찾아온 시민들에게 입춘축 써서 무료나눔을 시행했다.
세시풍속 잇는 마을공동체

입춘은 보통 2월4일경에 해당되며, 올해 입춘시는 오후 6시46분이었다. 예로부터 입춘날 입춘시에 입춘첩을 붙이면 "굿 한 번 하는 것보다 낫다"는 속설이 전해져온다. 첫 시작을 알리는 절기인 만큼 사람들의 기대가 한 데 뭉쳐진 탓이다. 때문에 정월대보름과 함께 현재도 많은 지역에서 입춘행사와 더불어 마을축제가 열리고 있다.

정읍 진산마을은 4일 오전 10시~오후 6시46분까지 '풍농기원 입춘한마당'을 열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추진 중인 '세시풍속을 잇는 전통마을 발굴사업' 대상에 선정됐기 때문이다. 이날 진산마을 사람들은 오신반 나누기, 오곡(검정콩, 메밀, 수수, 조, 팥) 점치기, 보리뿌리 점치기 등 체험마당을 열고, 이어 오후 6시46분 입춘시에 맞춰 입춘첩 붙이기를 진행했다. 특히 이날 액을 물리는 지신밟기와 풍장굿에는 주민들의 참여로 흥겨운 한마당이 펼쳐졌다.

경기도 시흥·여주, 인천, 전남 구례 마산마을에서는 보리뿌리를 뽑아 풍작을 점쳐보고, 충남에서는 오곡의 씨앗을 솥에 넣고 볶아 맨 먼저 솥 밖으로 튀어나오는 곡식을 그해 풍작으로 여겼다. '탐라국 입춘굿'으로 입춘을 여는 제주도는 입춘 세시풍속이 지역전통축제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예로부터 입춘날 날씨가 맑고 바람이 없으면 풍년이 들고, 눈이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흉년이 든다는 설이 있다. 농사는 사람과 천지가 함께 짓는 일이기에 풍작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날씨로 표출된 모양이다.

설 세시풍속, 한 해 안녕과 정을 담다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다.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큰 명절로 정해졌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시대에는 설날이 한식·단오·추석과 더불어 4대 명절로 여겼다.

설날의 세시풍속으로는 차례, 세배, 설빔, 덕담, 문안비, 설그림, 복조리 걸기, 야광귀 쫓기,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등 다양하다. 그중 차례는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 대청마루나 큰방에서 제사를 지내는 풍속으로, 지금은 가족 간 음식을 나누는 정도로 축소됐다. 교단에서는 설 합동 향례로 조상들을 위한 축원을 올리고 있다.

차례를 마친 뒤 조부모·부모에게 절을 하며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세배는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전통문화가 되었다. 또한 설날의 대표 음식인 떡국은 고대의 태양숭배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새해 첫날의 밝음을 의미하는 흰 색과 태양을 본뜬 둥근 모양이 그것이다. 이렇듯 우리 일상생활과 깊이 관련돼 있는 설 세시풍속은 설 연휴 동안 지역 박물관이나 민속촌에서 다채롭게 열리고 있다.
▲ 고일영 교도는 전통 쌀엿 마을명인으로 활동중이다.
한과·쌀엿 명인 낳은 삼지내마을

설 명절에 나눠 먹는 음식 중에는 떡국 외에도 한과와 쌀엿 등이 있었다. 전통 한과와 쌀엿 명인을 낳은 담양군 창평면 삼지내마을, 이곳은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2007년)된 곳이기도 하다. 월봉산에서 유래한 월봉천, 운암천, 유천 등 세 갈래 하천 물이 모인 곳이라 하여 이름 지어진 삼지내마을은 백제시대 쌓은 토석담과 100년도 넘은 전통 한옥이 잘 보존된 곳이다. 때문에 전통마을의 모습과 장인의 손길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이곳은 방문객들에게 상시로 '창평 쌀엿 체험, 한과 만들기' 체험마당을 열어 사라져가는 우리 선조들의 기술을 손에서 손으로 전하고 있다.

18살부터 시작해 지금도 가마솥에서 엿을 고아 만든다는 고태석(73·법명 일영·창평교당) 쌀엿 명인은 엿 가락에 담긴 지난 55년의 세월을 털어놓았다.

그는 "창평 쌀엿은 그 해 수확한 우리 쌀을 가지고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만든다"며 "한번 만들 때 48시간을 솥에서 고아야 하는데 그때는 잠을 못 잔다. 한때는 집집마다 엿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장작불을 피워 솥에서 엿을 고는 집은 3집뿐이다"며 슬로시티 방문객들에게 자신의 손으로 만든 엿을 나누는 기쁨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지금은 부인 이민숙(69·창평교당) 교도와 함께하고 있지만 그에게 엿 만드는 기법을 전수해준 100세 넘은 어머니도 함께 살고 있다.

설을 맞아 고씨네 아들 가족이 대문에 들어선다. 그가 반기며 던진 말, "아들 녀석이 언젠간 내 기술을 잇는 날이 오겠죠."

시대가 변했다. 전통을 잇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또한 우리에게 남은 숙제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