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서 저술로 읽는 교사〉

▲ 원기9년 원불교의 창립총회를 열었던 익산시 마동 보광사.
원불교의 창립총회가 이루어진 것은 갑자년인 원기9년(1924) 6월1일이다. 지금의 익산시 마동 보광사(普光寺)에서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라는 임시 교명으로 교단을 공개한 것이다. 이 때 채택된 교단 최초의 법규가 〈불법연구회 규약(規約)〉(이하 규약)이니, 오늘의 〈원불교 교헌〉에 해당한다.

총회 당시는 일제강점기라, 가지가지 염격한 제약이 따랐다. 1910년 한일합방과 동시에 일제는 무단통치기(武斷統治期)에 들어간다.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신도(神道)·불교·기독교를 공인종교라 하여 문부성에서 관리하며, 그 외의 모든 종교단체를 유사종교(類似宗敎)라는 이름으로 법무성 경찰국에서 단속(取締)하는 형태이다. 그 가운데 대종교 등의 지하종교·민족운동이 끊이지 않고, 드디어 1919년 불교·천도교·기독교인으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한 3.1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것이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통치정책을 바꾼다. 이른바 지하운동을 공개시키면서 통어하는 문화정치기(文化政治期)이다. 허가를 얻은 집회가 부분적으로 가능해져, 1921년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의 보천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교단도 이때를 기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한다.

39명이 모인 이 총회에서 대종사를 총재로 추대하고, 서중안(秋山 徐中安, 1881-1930) 대호법을 회장, 오창건(四山 吳昌建, 1887-1953) 종사 등 8명을 평의원으로 선출한다.

그리고 첫째 〈불법연구회 규약〉 통과, 둘째 회상 유지 안건, 셋째 회관 즉 중앙총부 건설, 넷째 영산(기성조합)출장소 설치를 가결했다. 채택된 규약은 총칙·임원·회의·회원의 권리 의무·가입 및 탈퇴·회계 및 기타의 총 6장 22조였다. 회상 운영을 위하여 서무·교무·연구·상조조합·농업·식사·세탁의 7부를 두고, 총재 1인, 회장 1인, 부장 평의원 간사 각 약간인을 두며, 정기총회·임시총회·평의원회·월예회 등 4종의 회의를 두고, 유지는 입회금·연연금(年捐金)·의연금·농작·식리금 등으로 충당키로 규정한다.

이 규약에 의해 교단체제가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 임시로 만들어 사용했던 것은 전하지 않고, 1회 12년을 마감하면서 원기12년(1927) 3월에 교단 최초의 인쇄물로 간행된다. 이는 총회시의 내용을 확장하여 책머리에 본교(本會)의 유래 등을 싣고, '연구인 공부순서'에 각종 교리, '본교의 세칙'에 각종 예절과 규칙을 담고 있다. 이를 '규약경전'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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