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 화풍, 비구상·반추상 세계 열다

▲ 민경갑 회장은 법신불 일원상의 원(○)을 역동성이 살아있는 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교당에 안치된 원이 생명력을 얻도록 예술적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묵과 한지의 동양화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해석해 낸 유산 민경갑(84·酉山 閔庚甲)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이러한 그의 그림은 동양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시대감각을 작품에 잘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양화에 비구상과 반추상의 조형양식을 과감히 시도해 한국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의 작품은 한국화의 독창적인 화풍(畵風)을 형성했다.

그의 나이 36세 때 브라질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초대되는 등 젊은 나이에 국제화단의 주목을 받았고, 1979년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연 후 33년만인 2012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초대 개인전을 가졌다.

한국화의 산 증인이자 계보 자체인 그를 서울시 연희동 화실에서 만나 작품세계와 예술혼 등에 대해 들어봤다.

- 그림공부에 입문하게 된 과정은

고등학교 때 생물반으로 동아리 활동을 했다. 생물반은 개구리 등 동물을 해부하는 실험을 많이 했다. 그런데 나는 하라는 해부는 안하고, 해부된 것을 종이에 잘 그렸다. 그냥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고 재미가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본 선생님과 친구들이 생물반 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낫겠다고 권유해 미술반에 입문하게 됐다. 미술반에 들어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미술선생님께 미대에 진학하겠다고 하니, '화가로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죽으려고 하느냐'며 말렸다.

하지만 그런 미술선생님의 만류는 청소년기의 반항으로 이어졌고, 결국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지원하게 됐다. 그렇게 나는 화가로서 업을 시작했고, 이제는 천직으로 여기고 있다.

- 작품 활동의 여정이 궁금하다

작품 활동 60여 년 동안 구상, 추상, 반추상을 넘나들었다. 자연과 조화, 공존, 자연 속으로, 무위, 진여의 주제로 창작활동을 해왔다. 내면 모국의 토양과 마주하는 심상(心象)의 형상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추상화에 몰두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적 토속, 민속, 무속을 작품에 담아왔다고 볼 수 있다. 동양적인 한국적인 주제를 택했지만 나만의 새로운 화풍을 만들었다. 현대회화는 기법도 다채로워졌고, 매체간의 경계도 무너지고 있다. 한 작품을 놓고 '이것은 동양화다, 서양화다' 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융합된 창작품들이 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정체성을 구분하는 것은 '주제의 중심개념'에 있다.

나의 작품은 종이에 먹을 침투시켜 운필에 따라 표면화되는 발묵 기법을 사용한다. 담묵과 농묵 그리고 담채와 진채에서 빚어내는 다양한 명도와 채도의 층위를 잘 활용해 그림을 그린다. 현재처럼 한국의 토속성이 사라져 가고 있는 이때, 한국화의 정체성을 더욱 고민해야 할 것이다.
▲ 무위 09-19 / 46×53cm.
- 한국적인 주제는 어떤 것들인가

나의 작품을 보면 처음에는 서양 추상을 따라갔다. 대학 3학년 때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차지할 정도로 추상미술의 1호로서 8년간 전력투구하며 여기에 매달렸다. 그런데 내가 타고 있는 말이 서양말이더라. 그래서 다시 구상에 8년간 전념했다.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하고 고민할 때 찾은 것이 성황당이었다. 마을마다 있었던 그 성황당.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천의 빛깔이며 소원, 새끼줄 등 그런 느낌들에서 한국적인 정체성을 구상했다.

나의 작품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기학적인 표현까지 이어졌다.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회를 할 때 기학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그런데 나의 작품을 다시 돌아봤을 때 동양적인 맛이 나지 않았다. 잘못 가고 있구나하고 생각해서 무위(無爲)에서 진여(眞如)로 주제를 바꿨다. 그 다음 넘어간 주제는 잔상(殘像)이다.

- 개인적인 작가정신은 무엇인가

작품 제작에 있어 아첨하지 말라. 아첨이라는 것은 자기 작품을 예쁘게 다듬어 내는 것을 말한다. 자기 세계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는 남의 작품을 모방해서는 안된다. 셋째는 작가로서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해야 환쟁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작품 활동이다. 매일 붓을 들지 않으면 녹이 슬고, 자신의 뇌 역시 식어버린다. 아직도 제일 큰 고민은 창작의 아이디어다. 나에게 자극과 용기를 주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동료와 후배들이다. 이들이 가끔 나의 화실에 오면, 작품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네준다. 동료와 후배들이 내 작품을 보고, 별 다른 반응이 없을 때는 고통스럽다. 더 분발하라는 충고 같다. 하지만 나는 일생을 쉬지 않는 실험정신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만들어 왔다. 나의 변화된 작품세계를 목격한 이들이 오히려 자극을 받고 가는 모습을 볼 때 작가로서 보람과 만족을 느낀다.

- 원, 일원상 작업을 하는 것으로 안다

일반적으로 원(○)은 동그랗고, 둥글어서 그 자체는 딱딱한 느낌이다. 한마디로 역동성이 없다. 시각적으로 여유와 정이 없고, 움직임이 없어서 죽어있는 느낌이랄까. 생명력이라는 것은 고정되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

원불교에서 원은 법신불 일원상으로 신앙의 대상, 수행의 표본으로 알고 있다. 내가 그리는 일원상은 우주 속의 움직임, 하늘 위에서의 움직임을 표현하려고 했다. 예술도 그렇지만 생각, 사상, 진리도 변불변의 이치가 있다. 세상은 정적인 것보다는 동적인 것이 훨씬 크다. 이런 변화를 담아내려고 한다. 가만히 고정된 원이 아니라 활력이 넘치는 원을 그리고 싶었다.
▲ 진여 Ⅱ-4 / 73×91cm.
- 교단 예술분야에 조언한다면

예술이라는 분야는 어떤 고정된 틀에 갇히면 생명력을 잃는다. 나만의 종교에 고정시켜 종교예술을 발전시키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종교정신을 가지돼 상상력을 발휘해서 창작작품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종교예술도 창의적 도전정신이 담겨져야 한다. 많은 훈련을 통해 다채로운 시도들이 선보여져 할 것이다.

더불어 '현대인들이 현대화를 제대로 모르고 산다'는 이야기가 있다. 혼자만의 작품활동도 중요하지만 대중과 호흡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얘기다. 예술가는 작품 전시회나 기획전 등으로 신자 및 일반인들과의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이들과의 소통을 통해 내 작품이 평가를 받고, 예술 기획의 영감을 얻을 수 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가

창작활동을 쉬지 않겠다는 다짐뿐이다. 내가 늙었다고 느껴질 때는 호기심과 열정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때다. 미수(88세)가 되면 88점의 작품을 가지고 전시회를 하고 싶다. 단 그림 크기는 100호 이상으로 할 예정이다. 아직 4년 남았으니 실험적 작품 활동을 통해 예술 혼을 불사르겠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매일 창작활동을 해야 진정한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민경갑 회장은

ㆍ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ㆍ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대표작가
ㆍ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역임
ㆍ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초대 개인전
ㆍ대한민국 문화예술상
ㆍ서울특별시 문화상
ㆍ대한민국 예술원상
ㆍ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 단국대학교 석좌 교수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