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집 태우기는 달집의 대나무가 불에 타면서 터지는 소리에 잡귀와 액운이 물러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지신 밟기와 달집 태우기로 한 해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정월대보름. 22일 대보름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21일 충남 당진시 송악읍 기지시 줄다리기 박물관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기지시 줄다리기 대보름 행사가, 충북 단양군 두악산에서는 제23회 소금무지제가 진행됐다. 강원도 강릉에서는 동해안 대표 정월대보름 행사인 망월제가 펼쳐졌으며,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은 제1회 개평마을 대보름 달맞이 축제를 열기도 했다. 고유절기 정월대보름을 맞아, 신명 넘치는 풍악을 전하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마호 필봉농악의 굿축제 현장을 찾았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임실필봉농악

20일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필봉마을에는 올해도 변함없이 켜켜이 묵은 액을 털어내고 새로운 한 해의 대풍년을 기원하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서른다섯 번째 정월대보름 굿판은 신명나는 가락 속에 주고받는 재담과 덕담으로 매해 늘어나는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4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임실필봉농악은 마을에서 전승되어온 호남좌도 농악의 대표적인 마을 풍물굿이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마을 속에서 전승된 삶의 문화를 토대로 한 필봉풍물은 1962년 보존회를 설립, 1988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수많은 명인들이 함께 노력해 그 맥이 끊이지 않고 전승되어 왔으며, 현재 연간 6만여 명이 찾아오는 문화촌을 형성해 전통문화 보존을 위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옛 사람들의 삶이 녹아있고 마을의 역사가 녹아있는 필봉의 무형의 가치는 전판이-이화춘-박학삼-송주호-양순용-양진성으로 상쇠 계보를 이어가며 보존하고 있다.
현재 6대 상쇠는 양진성(법명 원근·100주년기념대회 연희기획감독) 필봉농악보존회장이 맡고 있다.

양 교도는 "매년 2월20일이면 필봉마을에서 정월대보름 굿판이 열린다. 고 양순용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장고는 바르게 치라'는 뜻을 기억하며 올 대보름 굿도 신명나게 울렸다"며 "일년의 첫 보름달을 기다리며 드리는 정성은 불안한 미래에 대해 예측해 보고 풍요를 기원하는 중요한 기제가 될 것이다. 지혜롭고 훌륭한 우리 문화이자 놀이인 정월대보름 굿을 통해 마을 구성원들의 화합을 다지고자 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번 축제는 관광객이나 외지인이 중심이 아닌, 오랫동안 전통굿판을 지켜온 필봉마을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그 원형의 굿판을 채워나갔다. 또한 어릴 적 추억의 민속놀이인 소원지 쓰기, 연날리기, 쥐불놀이, 부럼깨기, 고구마 굽기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열려 관람객들이 세시 음식과 놀이를 통해 즐거움이 배가 될 수 있게 도왔다.

전주에서 온가족이 함께 왔다는 이해진 씨는 "2시부터 10시까지 이어지는 행사라 아이들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아이들이 더 재밌어 했다. 여러 가지 체험 코너가 마련돼 있어서 어린이들은 흥미를 느끼고 어른들은 향수에 빠질 수 있었다"며 "정월대보름이 무엇인지, 마을 농민들이 왜 예를 올리는지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특히 외국인들도 많아서 마을 행사가 아닌 전 세계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로 발전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 20일 임실군 강진면 필봉마을에서는 한 해의 대풍년을 기원하는 제35회 필봉 정월대보름굿축제가 열렸다.
마을문화의 꽃 필봉농악

필봉정월대보름 축제는 오후2시 필봉마을 동청마당에서 정월대보름의 시작을 알리는 '기굿'을 울리며 출발했다. 마을의 가장 넓은 곳에 모여 농민의 상징인 용기(龍旗)에 정성을 다해 예를 올리고 굿판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어 마을 어귀 당산으로 옮겨 마을 수호신에게 축제 시작을 고했다. 필봉마을의 상징이자 역사를 함께한 당산나무 앞까지 이동한 풍물패는 한바탕 굿을 벌이고, 마을 식수원인 공동 샘에서 '아들 낳고 딸 낳고 미역국에 밥 말세'로 건강과 다복을 비는 기원을 올렸다.

마을 가가호호를 방문해 각 가정의 안택을 기원하는 '마당밟이굿'도 이어졌다. 집 앞에 도착한 풍물패는 "주인 주인 문 여소 문 안 열면 갈라요"라며 문 굿을 쳤고, 주인은 문을 열고 쌀말에 초를 꽂아 내어놓았다. 흥에 겨운 이들이 성주풀이와 노래를 부르며 여흥을 돋웠고,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과 풍물패, 마을 사람들이 한데 어울리는 진풍경을 이뤄냈다.

저녁7시 연예성과 오락성이 두드러지는 푸진 판굿이 무대에서 펼쳐졌다. 채굿, 호허굿, 풍류굿, 영산굿 등의 앞굿과 설장고, 잡색놀이, 소고춤, 재능기 영산굿, 노래굿, 대동굿 등 음악과 춤, 극, 놀이 등의 다양한 예술형태인 판굿은 단연 대동굿의 백미였다.

판굿의 흥이 절정에 솟는 끝자락, 참가자들의 한 해 소망이 담긴 소지가 달린 달집에 불이 붙었다. 달집의 대나무가 불에 타면서 터지는 소리에 잡귀잡신과 액운이 모두 물러간다는 뜻을 가진 '달집 태우기'는 대동합굿(공동체 굿판)으로 함께 어우러졌다. 세상 속 껍데기를 달집 속에 벗어던진 관광객들은 밝은 달처럼 올 한 해 넉넉하고 여유로운 삶의 주인이 되기를 한마음으로 기원했다.
▲ 필봉 정월대보름굿축제를 찾은 한 가족이 소망을 담은 소지를 매달고 새해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했다.
밝은 달 아래 즐기던 상원절식

정월대보름(음력 1월15일)은 한자어로 상원(上元)이다. 상원은 중원과 하원에 대칭되는 말로 세시풍속에서는 설날만큼 비중이 크다. 달의 움직임을 표준으로 삼는 '음력'을 사용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대보름날이 설보다 더 중요한 뜻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대보름날 전라남도에서는 열나흗날 저녁부터 보름날이 밝아야 운수가 좋다고 해 집안이 환해지도록 불을 켜놓았으며, 경기도에서는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고 해서 잠 안 자기 내기를 하는 곳도 있다.

대보름 전날에는 쌀, 팥, 콩, 조, 수수를 넣고 오곡밥이나 찰밥을 지어 이웃과 나눠먹었다. 다른 성을 가진 세 집 이상의 이웃집 밥을 먹어야 그 해 운이 좋다는 풍속도 전해졌다. 오곡밥과 함께 곁들이는 '진채식'은 9가지 묵은 나물로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뜻을 지녔다. 대보름 새벽에는 눈을 뜨자마자 날밤과 호두, 은행, 잣, 땅콩 등을 깨무는 부럼깨기를 했다. 부럼을 깰 때 나는 소리가 잡귀를 물리친다고 해서 '작절'이라고도 불린다. 어른들은 아침부터 데우지 않은 청주를 한잔씩 마셨는데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해서 '귀밝이 술'이라고도 불렸다.

일 년 중 가장 큰 달이 차오르는 정월대보름, 이웃들과 풍성한 별식을 나눠 먹으며 새로운 희망을 두둥실 띄워 올려보자.
▲ 쌀·팥·콩·조·수수가 들어간 정월대보름 오곡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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