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효천 교무/군종교구
음력 새해인 설날을 맞아 한동안 자주 연락하며 지내지 못한 지인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마음의 인사를 받게 된다.
자주 챙기지 못하는 나의 무심함을 돌아보며 어떻게 하면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명절을 맞아 차량으로 이동을 하며 라디오 원음방송을 청취하는데 진행자의 마지막 인사가 가슴에 와 닿는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라며 프로그램을 마친다. 원불교 교도가 아닌 일반 청취자들은 의아할 수 있는 인사말이 우리에게는 미소를 짓게 한다. 원불교 재가출가 교도들의 새해 인사 문구는 재미있다.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라는 인사를 주고 받는다. 인사말 하나에도 복도 지어야 받는다는 신앙과 수행이 묻어있다.

지금은 받는 것이 너무나 익숙한 사회가 되었다. 옛날 어렵게 의식주를 구하던 때를 생각하면 말이다. 과거와 다른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받는 것이 익숙해진 우리는 받고 또 받는 것의 달콤함에 중독되어 끊임없이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된다.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고향을 찾고 부모님과 많은 대화를 하며 못 다한 효도를 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어느덧 어린아이가 되어 부모에게 대우를 받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게 한없이 받았지만 오히려 빚만 지게 되는 원인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어리석음은 받는 것에만 익숙해지고 주는 것에는 인색해진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소태산 대종사는 "다른 사람을 바루고자 하거든 먼저 나를 바루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자 하거든 먼저 내가 배우고, 다른 사람의 은혜를 받고자 하거든 먼저 내가 은혜를 베풀라. 그러하면 나의 구하는 바를 다 이루는 동시에 자타가 고루 화함을 얻으리라" 〈대종경 요훈품 14장〉 했다.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어른들이 새뱃돈을 주듯 누군가 나에게 복이라는 것을 따로 주는 것은 아니다. 복을 받기 위한 주체는 내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복을 받을 준비와 자격을 갖추었을 때 그 복은 내 삶에 녹아나 행복으로 다가온다. 은혜라는 복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복을 지어야 한다. 하지만 복을 지을 때 한 가지 유념할 사항이 있다. 

이 시대 청년들은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남에게 줄 때 '투자'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투자는 상대가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따져보고 내 것을 나눠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대이상의 이익이나 손실을 가져오면 그것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생겨난다.

그러나 베푼다는 개념은 내가 상대를 도움 주었다는 생각조차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그것을 받고 나에게 무엇을 준다, 안 준다하는 기대 또한 없는 행위다.비어있는 마음은 놀랍게도 다시 크게 채워지는 게 진리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새해에는 우리가 서로 건넸던 인사처럼 서로가 복을 짓는 사람들이 되어 행복이 넘치고 지혜가 가득한 생활로 거듭났으면 하는 마음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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