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서 저술로 읽는 교사〉

▲ 소태산 대종사가 석굴암을 방문했을 때 함께 동행했던 조송광 선진.
경산조송광(慶山曺頌廣, 1876-1957)중희사는 그리스도교 장로의 신분으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제자가 된 인물이다. 〈대종경 (전망품 14장)〉에는 그 최초 만남의 대화내용이 자세하게 나타나니, 원기9년(1924)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직전의 일이다. 그는 원기16년(1931) 서중안 대호법에 이어 불법연구회 제2대 회장으로 피선된다.

그런 그에게 중년인 원기18년(1933)에 기록한 〈조옥정백년사(曺沃政百年史)〉(이하 백년사)를 전한다. 그가 원기16년(1931) 불법연구회 제2대 회장에 피선되었던만큼, 이에는 교단관련 기사가 들어 있어서 흥미롭다. 그의 본명은 공진(工珍), 송광은 법명, 법호는 경산(慶山)이며, 옥정은 꿈속에서 얻은 도호이다. 〈백년사〉는 미농지의 수고본(手稿本) 45장이다.

56세 된 원기17년(1932) 11월 장남(曺壽煥)이 사는 오사카(大阪)에서 자신의 행장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월까지 마치고 있다. 여식인 조전권(空陀圓曺專權, 1909-1976)종사의 문집과정에서 공개되었다. (박용덕, '경산연대기 〈조옥정백년사〉', 〈정신개벽6〉) 조송광은 어려서 유학을 공부하고 동학혁명에 참여하였으며 의원이 되었다. 기독교를 신봉하여 교회를 짓고 장로가 되었으니, 신앙은 깊고 풍부한 식견과 갖추어진 인격은 이르는 곳에 항상 감화를 미쳤다. 마침내 행상으로 집안에 드나들던 증산교 신봉자였던 장적조(二陀圓 張寂照, 1878-1960)대봉도를 통해서 대종사 문하에 든 것이다. 그의 행장에 나타나는 사상은 연호(年號)를 통해 자세한데, 어려서는 조선의 〈개국(開國)〉, 다음은 기독교의 〈주후(主後)〉, 그리고 원불교의 〈불시창(佛始創)〉을 사용하여 그의 행적과 사상의 흐름을 드러내 보인다.

원기16년 그는 대종사를 모시고 부산과 경주를 여행한다. 당시 그는 "토함산 석굴암/ 말없는 부처님 중생을 건지네(吐含山石窟庵 無語佛度衆生)"라 읊고, 대종사는 "무정한 석굴암도 모든 사람의 찬양을 받거든/ 항(況, 아물며) 구별력 있는 사람이 어찌 그져 있으랴"라 읊고 있다. 이에는 자작 한시 22수와 차운(次韻) 사람의 시, 가사 및 시조 8수를 전한다. 그 가운데 동선(冬禪)에 참여하고 결제가와 해제가를 남기고 있으니, 그 마음이 잘 녹아 있다.

조송광은 이후 20년간 교단에서 활약하였다. 원불교 정녀교무의 문을 연 조전권의 교화력이 남다르게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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