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의 힘

▲ 도형래 교도/서울교당,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사실 수도권의 역사는 서울 역사의 일부다. 빽빽한 서울에서 솎아 내진 사람들의 이주가 수도권 역사 시작이기 때문이다. 수도권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성남과 경기도 광주다.

성남은 조선시대까지도 없던 지명이다. 성남(城南)이라는 지명은 '남한산성 남쪽'이라는 뜻으로 일제강점기 때 붙은 이름이다. 수도권 일대에는 일제가 지은 지명이 많다. 이름의 면면을 보면 대개 대강 붙인 이름이다. 이름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일본 특유의 문화가 반영됐을 수도 있고, 수탈을 목적으로 나눈 구획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군포 '산본(山本)' 역시, 이런 식의 이름이다. 한자말 풀이는 이상하지만, 일본말로 산본(やまもと)은 산 밑, 산 아래를 뜻한다. 수리산 아래에 있는 마을에 대강 산본이라는 이름을 붙인 셈이다. 산본이라는 이름은 전남 광양에도, 경남 김해시 진례면에도 찾아볼 수 있다. 나고야성이 있는 일본 사가현에도 야마모토(山本)역이 있다. 성남은 강원도 원주, 전북 익산, 충남 홍성, 전북 고창 등지에도 있는 지명이다.

성남은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가운데 가장 작은 '리'단위였다. 이 성남리가 어엿한 도시가 된 데에는 박정희 정권의 무식한 행정력이 작용했다. 1968년 박정희 정권은 서울 도심을 정비하기로 마음먹고 군인 특유의 폭력적 강제 이주를 시행한다. 청계로 일대 무허가 판잣집에 옹기종기 살고 있는 이들을 군용 트럭에 태워 옛 광주시 일대 개활지로 데려갔다.

당시 관료들은 이들에게 집과 땅, 일거리를 약속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린 것은 가구당 20평 남짓 흙바닥이 드러난 땅과 거기에 덩그러니 놓인 천막뿐이었다고 한다. 국회에 제출된 문서에서는 당시 상황을 "식수·전기·전화·도로 등 사회 기반시설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식수공급이나 화장실조차 건립되지 않은 채였으며, 이주지역 내에 생계수단이 전무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내몰린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2만 1천372세대 10만 1천325명'으로 집계된다.

내몰린 이들은 관료들이 토지대금 뿐만 아니라, 각종 과중한 세금을 독촉하자, 집단으로 항의시위를 하게 됐다. 이게 1971년 8월10일 발생한 '광주대단지사건'이다.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먹을 게 없던 사람들이 인근 마을을 거지 때처럼 몰려다녔다"고 증언했다.

당시 정권의 검열을 받던 언론들은 이들을 '부랑자'로 매도했고, 국무총리는 1971년 국회에서 이들의 시위를 '난동'이라고 불렀다.

10만 명이 서울로 향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시장을 시켜 사과하고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선에서 사건을 매조지했다. 하지만 '폭동'이라는 낙인은 40여년이 지난 2012년 '광주대단지사건 관련 성남시민 명예회복 촉구 결의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나서야 떼어낼 수 있었다.

이 광주대단지사건으로 광주군 성남출장소가 성남시가 된다. 서울시로부터 핍박받던 이들이 독립된 도시로의 승격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내몰린 이들이 천막 생활을 했던 곳이 지금의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 일대다.

'하늘엔 천당, 하늘 아래 분당'은 1988년 전두한 정권 때 개발된 곳이다. 분당이 개발되고 나서 성남시는 분당구와 옛 도심지인 수정구, 중원구와 극심한 경제 격차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성남 옛 도심은 그야말로 최초 신도시라는 이름과 달리 졸속한 난개발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분당은 소위 서울 강남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제대로 계획하고 개발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성남 수정구 태평동에 가보면, 부산 수정동 삼복도로에서나 볼 수 있는 경사로의 아찔함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계획했다는 신도시 성남에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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