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 교수의 현대건축이야기

▲ 서로 다른시간의 충위를 넘나드는 김중업 박물관.
▲ 조한 교수/홍익대학교 건축학부
안양예술공원의 새로운 식구로 김중업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안양예술공원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공용주차장 못미쳐 왼편에 공장 건물처럼 보이는 곳이다. 이 곳은 오랫동안 안양유원지로 알려졌던 곳으로, 2005년에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를 통해 예술공원으로 재탄생했다. 관악산 삼성천 계곡을 따라 주변 환경을 정비하고,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야외에 자리 잡으면서 새로운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건축가 김중업하면 '주한 프랑스 대사관(1960)'이나 올림픽 공원에 있는 '평화의 문(1988)'의 역동적인 지붕선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인데, 박스 형태의 김중업 박물관은 사뭇 정적인 느낌이다. 공장처럼 보이는 것도 원래 유유산업의 공장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유유산업은 1941년 순수 민족자본으로 유득한이 창립한 제약회사로, 한국전쟁 이후 이곳을 매입해 김중업 설계로 1959년 5월에 준공한 후, 2007년 안양시가 매입할 때까지 50여 년 간 이곳의 랜드마크였다.

원래 공장의 사무동이었던 김중업관의 기둥은 외부로 분리되어 리드미컬하게 느껴지고, 연구동이었던 문화누리관은 거대한 볼륨이 공중에 떠있는 듯한 느낌인데, 이는 한국적 건축에 대한 김중업의 고민과 실험이 반영된 것이다. 김중업관 내부로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김중업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대사관, 제주대학, 서산부인과의 모형 뿐 아니라, 다양한 작품의 사진과 도면을 살펴볼 수 있게끔 아카이빙이 잘 되어 있다. 특히 김중업이 여행 다니면서 그린 스케치북과 노트가 아주 인상적인데, 꼼꼼하게 그린 스케치와 손글씨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그와 함께하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김중업 박물관이 오픈하기까지 사연이 많았다. 박물관 터를 파던 중에 옛 안양사의 유구가 발견된 것이다. 원래 이곳은 신라 흥덕왕이 827년 세운 중초사 자리로 오랫동안 알려진 곳이다. 실제로 공장 초입에는 보물 4호인 중초사지 당간지주가 서있다. 그런데 2010년 8월 공사현장에서 우연히 '안양사'라고 새겨진 기왓장이 발견되면서, 태조 왕건이 창건했다는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안양사가 세상에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안양사는 안양이라는 지명의 유래이기도 한데, '안양'이란 불교에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정토를 말하는 불교용어이다. 기와 외에도 연구동 앞에서는 칠층전탑의 벽돌이, 공장 입구 쪽에서는 중문터가, 연구동 북쪽에서는 금당터와 함께 정면 9칸 측면 4칸의 대규모 강당터도 발견되었다. 또한 주변에는 법당을 중심으로 사방을 복도로 연결하는 회랑터도 발견되었다. 전체적으로 남쪽 맨 앞에 중문이 있고, 그 뒤로 하나의 탑과 본존불을 모신 금당, 그리고 강당이 이어지는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신라시대 전형적인 가람배치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유물과 유구가 발견되자, 한 쪽에서는 공장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대대적인 발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김중업 건물의 가치도 인정해야 한다며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하지만 발굴로 2년 넘게 공사가 중지되면서, 공장 건물 19개 동 중 13개를 재활용한 원안을 대폭 수정해서 공장 건물 6개 동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거하는 쪽으로 합의하게 된다. 또한 공연장으로 예정되었던 북쪽 건물은 발굴된 안양사지 유물을 전시하는 안양사지관으로 변경되었고, 앞쪽에 공장 건물을 철거한 공간에는 발굴된 안양사지 강당의 주춧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안양사지와 김중업의 건물이 상생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이렇게 김중업 박물관의 매력은 단지 김중업의 작품세계를 감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를 넘나드는 것에 있다. 삼국시대 신라의 중초사에서, 고려시대 안양사로, 그리고 산업화시대의 유유산업 건물까지, 한 번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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