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4일이므로 꽤나 시간이 지난 일이 됐다. 이날 영산출장소 김형진 교무가 대종사의 귀영바위 집터를 고증하는 일을 시도했다. 고증작업에는 원불교 초기교단사를 집필했던 주산 박용덕(60)교무를 포함해, 선산 이선우(88) 오타원 임선양 (86) 법산 이백철(82) 시산 김정관(78) 석산 한정석(77) 원로교무가 참여했다. 또 이 마을에 사는 박용근(74)씨도 와서 중요한 증언을 했다. 박씨는 대종사의 사촌동생 박동철씨의 아들로 대종사 조부와 증조부 묘를 관리하고 있다. 그는 길용리에 남아있는 대종사의 유일한 친척이다.

위 사진은 묵산 박창기 선진이 찍은 귀영바위 앞 오두막 집터이고, 아래 사진은 24일 위의 사진과 똑같은 위치에서 찍어본 것이다.

10년 후 혹은 90년 후
귀영바위 집은 대종사가 스무한살부터 스무세살 여름까지 3년간 머문 집이다. 이 집에 대해 맨 먼저 증언한 이는 승산 김형오(1911∼1984)이다. 그는 <원광> 창간호(1949)에 '대종사일사'라는 제목으로 실은 글에서 이 집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후 박용덕 교무가 <정신개벽 12집> (1993)에 <승산의 구술자료 주해>(대종사 생애담)를 발표하면서, 승산의 입을 통해 귀영바위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박 교무의 글은 승산이 타계하기 전인 1975년에 취재했던 것으로 승산의 '대종사일사'를 확인하고 수정하는 작업이었다.

이 글에서 승산은 "그 집(귀영바위 집)은 허물어져 버렸어. 개초도 안하고 제대로 관리 안하니까 장마비에 자빠져버렸어. 그래서 노루목이라는 데로 집을 장만해 가지고 스물네살 때 내려온 것이여"라고 구술하고 있다. 귀영바위 집은 대종사가 노루목으로 옮기게 될 때 이미 허물어져 버렸다는 이야기다.

이 날의 고증은 흔적 없는 집터를 찾는 일이었다. 고증에 참가한 원로교무 중 선산, 시산, 오타원은 대종사와 동향인 영광군 출신이다. 특히 오타원 임선양 원로교무는 중요한 증인이었다. 그는 1923년 백수면 길용리의 귀영바위 동네에서 출생했다. 14살 되던 해에 영산학원에 입교를 하고 21살에 익산 총부로 오기까지 거기서 수학했다. 그러므로 그는 귀영바위 동네의 옛 정경을 환하게 꿰뚫고 있었다.

오타원은 "주막이 귀영바위에서 대각선방향으로 10m 거리의 길가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오타원에 따르면 주막은 방 두칸 부엌 하나짜리 구조이며 길 쪽으로 문을 낸 동향집이다. 박용근씨도 "어렸을 때 여기에 주막이 있는 것을 보았다"며 오타원의 주장에 동의했다.

이 날 오타원의 고증이 끝나자 집터 자리에서 원로교무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동영상으로 기록했다. 석산 한정석 원로교무는 전거(典據)를 염두에 두고 카메라 앞에서 "집터가 확실히 고증된 만큼 이제 더 이상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며 "여기가 대종사님이 귀영바위 밑에서 살으시던 집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박용덕 교무는 승산의 구술자료를 들어, "대종사님이 살았던 주막은 1913년에 허물어져버렸다"며 "오타원님이 어릴 때 보았다는 귀영바위 주막은 동구밖 정자나무 아래 위치하여 주막자리로서는 안성맞춤 자리이긴 하나 1930년대 이후에 생긴 것 같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박 교무는 또 "주막을 열었던 시기와 운영자가 전혀 다를 뿐 아니라 그 위치도 다르다. 때에 따라 주막은 얼마든지 그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 같은 건물이라도 여염집이 주막이 될 수 있고 또 주막이 여염집이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박 교무의 주장을 두고 참가자들은 설왕설래했다. 논의의 주요쟁점은 승산의 구술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연표를 따져보면 박 교무의 주장에 공감이 간다. 박 교무의 말대로 대종사의 귀영바위 주막집이 1913년에 허물어졌다면, 오타원은 그 보다 10년 뒤인 1923년에 태어났으므로, 이 주막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주막은 대종사가 살았던 집이 아니라 새로 생긴 것이다. 다만 그 주막이 허물어진 집터에 새로 지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터에 지은 것인지가 규명되어야 한다.

묵산의 사진 
박 교무는 귀영바위 집터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물로 묵산 박창기 선진이 남긴 사진을 내 놓았다. 이 사진은 '소태산대종사'(1971)라는 사진첩에 실린 것으로, 묵산이 당시 유적지 보존을 위해 집터 주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거기에다 하얀 동그라미로 집 위치를 표시해 놓은 것이다. 사진에 표시된 장소는 오타원이 주장한 귀영바위 쪽이 아니라, 귀영바위에서 노루목을 향해 가다가 현 성지고등학교 정문 앞 약 15m지점이다.

묵산 사진의 표시지점은 승산 김형오의 구술과 일치한다. 승산의 구술을 들어보자.
"대종사님께서 지금 잠실이라고 귀영바위에서 조금 내려오면 지금 학교부지가 되었는데, 거기 그 자리를 백산 정학현씨가 학교에 그 땅을 희사하면서 그 땅을 이야기해 가지고 '우리가 아무 때라도 어떤 기념사업을 해서 돌이라도 표적을 하게 될 때에는 요 근방에 이해를 해라' 그래서 학교 옆에 땅을 이해를 얻어갖고 있어."

박 교무는 이 글에서 "자료 취재 당시(1975∼1980)만 해도 흙구덩이 바랭이네 집터인 밭자리에 나무가지로 표시해 둔 것을 보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길가에 큰 흙구덩이가 있었고 그 옆에 주막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당시 교학과 교사담당 교수이며 성지안내를 했던 석산도 수긍했다.

이에 대해 박용근씨는 "어릴 때 그 곳에 집은 보이지 않았지만 흙구덩이터는 있었다"면서 "흙구덩이터의 위치는 성지고등학교 정문 근처였으며, 정문 앞의 논은 이전에 밭이었다"고 증언해 박 교무의 말을 확인했다.

박 교무는 이 날 현장에서 "대종사의 친구인 충산 정일지가 이곳에 뽕밭과 잠실을 운영하여 동네이름이 잠실이 되었다"면서 "충산은 뒷날 이를 정리하고 전무출신했다"고 말했다. 충산은 중산 정광훈, 덕타원 정양선, 백산 정학현의 부친으로 승산의 고모부이다.

묵산의 사진에 표시된 곳이 대종사의 집터라면, 이 사진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박용덕 교무의 주장을 간추려 보았다.

사진을 믿을 수 있나?
대종사에 관한 사진은 모두 60여장이다. 묵산은 대종사 열반 후 추모의 정이 깊어져 영산 성지 촬영을 추진했다. 그는 원기28년 이리읍에 소재한 동양사진관의 사진사를 데리고 영산 일대의 성적지를 촬영한 일이 있다. 귀영바위 집터도 이 때 찍었다. 이 당시 사진들의 공통점은 사진설명이 일어와 한자가 혼용되어 있는데다 글자체가 같다. 원기28년에는 귀영바위 집에서 대종사를 시봉했던 사타원 이원화가 영산지부 감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묵산이 사타원의 고증으로 사진을 찍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또 이 당시에는 영산창업에 동참한 일산 이산 사산 육산 칠산 다섯 선진이 생존하고 있을 때인데, 이들이 당시 묵산의 사진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또 구술자료를 제공한 승산은 귀영바위 집터에 해마다 나무가지를 표시한 백산과는 고종사촌간이다.

사타원은 그들의 고모할머니의 수양딸이다. 이와같은 연유로 이들 친척사이에 귀영바위 집터에 대한 인식은 각별했다. 왜냐하면 사타원의 외삼촌이요 승산의 조부요 백산의 외조부인 김성서가 이 집을 잡아주며 영광부자에게 채무로 시달리는 대종사로 하여금 밥집을 해 빚을 갚도록 했기 때문이다. (완)

귀영바위 집은?

귀영바위. 대종사가 오두막에서 수양할 때 이 굴 안에서 입정삼매에 들기도 했다.

한반도가 일제에 강탈되던 해(1910)에 대종사는 부친을 여의고 가사를 책임지게 되었는데 영광의 부자로 부터 채무 상환에 시달리게 된다. 이미 가세가 기울어져 도저히 채무 이행을 할 수 없어 '이 일을 어찌 할꼬'하고 고민 중이던 대종사에게 부친과 절친한 김성서가 그 해결 방법으로 "밥집을 열어 채무상환을 할 것"을 제안했다. 이때 김성서는 생질녀인 사타원 이원화를 대종사에게 소개해 밥집을 운영케 했다. 그러나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고 잇속이 밝지 못한 사타원과 귀영바위 굴속에서 수양에 빠진 대종사의 관리 부족으로 밥집 운영은 실패로 돌아가고 영광 부자로 부터 더욱 채무 독촉을 받게 된다. 채무 상환은 이산 이순순의 주선으로 탈이 파시장사에 나선 후에야 해결이 된다. 부친상을 당하고 난 뒤 빚독촉에 시달리던 귀영바위 집 시절은 '이 일을 어찌 할꼬'[心事未定]하며 물질적 정신적 방황이 극도에 이르렀던 시기이다. 대종사는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산신령을 찾거나 스승을 찾는 등 밖에서 찾아오던 구도를 내면으로 돌려 자신의 안에서 찾는 구도를 한다. 구도자세의 큰 전환기였던 귀영바위 주막은 이러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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