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권 교도/여의도교당
오래 전에 배낭하나 걸머지고 혼자 중국, 티베트, 네팔, 인도 등지를 한 달 동안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국민총행복정책'을 쓰고 있다는 부탄을 들어가려 했으나 비자를 받지 못해 못 갔다. 그런데 행복은 부탄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걸망하나 짊어지고 오천축국을 고생고생하며 마음껏 유랑하는 내 마음에 최고의 행복이 있지 않았을까?

부탄은 1972년 4대 국왕 때 '국민총행복정책(Gross National Happiness, GNH)'의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이전 3대 국왕은 토지 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토지를 공평하게 나눠줬다. 이로써 사람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장 기초적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부탄이 '행복정책'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면, 꼭 우리나라의 1960~80년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떠오른다. 그만큼 적극적이란 얘기다. 다만 한국이 '성장'을 위해 달렸다면, 부탄은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게 다르다.

서구에서는 행복이 개인적이고 일시적인 감정이다. '난 지금 행복해, 불행해'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부탄이 추구하는 행복은 '깊은 만족'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소속감·공동체의 활성화 같은 것들이다. 게다가 부탄이 추구하는 건 개인의 행복이 아닌 공동의 행복을 말한다. 적어도 부탄에서는 경쟁에서 이긴다고, 더 많은 부를 소유했다고 더 행복해 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것을 행복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쨌든 부탄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나라인 건 분명해 보인다.

행복의 파랑새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벨기에 극작가 마테를링크는 1908년 <파랑새>라는 동화극을 발표했다.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 형제가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먼 길을 떠났다. 그들은 이곳저곳 많은 곳을 여행하며 파랑새를 찾았지만 파랑새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그 형제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헤매고 찾아다니던 파랑새는 자기 집 새장 안에 있었다. 옛날 말에 '길은 가까운데 있다'고 했다. 물론 행복도 가까운 데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행복을 가까운 곳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먼 곳에서 찾으려 애를 쓴다. 행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무시하고 물질적인 것, 즉 보이는 것만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마음의 눈이 가려진 사람일수록 마음의 세계는 무시한 채 보여 지는 것들이 전부라고 착각하기 쉽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잡을 수도 또 귀에 들리지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슬픔, 분노, 우울함, 기쁨, 절망, 자신감, 열정 등의 마음도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혀지거나 귀로 들리지는 않는다. 행복도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란 돈이나, 재색명리 같은 외적인 조건이 갖추어지면 생기는 것으로 착각한다. 물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낮은 주파수의 파동인 물질은 더 높은 주파수의 파동인 마음을 생성할 수 없다. 오직 높은 주파수의 마음 파동만이 낮은 주파수의 보이는 것들을 생성할 수 있다. 즉, 물질이나 현실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마음이 행복해질 때 행복한 현실이 창조되는 것이다.

행복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그래서 행복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는 구할 수 없고, 우리의 마음으로 직접 들어가서 구해야 한다. 수행을 하게 되면 현실적으로는 어떤 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다. 그런데도 자신감이 일어나고 행복해지는 것은 바로 이 원리 때문이다.

그럼 물질로 얻어지는 기쁨은 무엇인가? 그것은 행복이라는 표현보다는 쾌락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행복은 마음으로 상대를 깊이 이해하여 용서하고 자신을 참회 할 때 오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깊은 내적인 안정감이 평화다. 그리고 타인과 마음으로 깊은 교감이 일어날 때 느껴지는 감동이기도 하다.

행복은 이처럼 마음에서 현실로 이뤄진다. 사람들이 '일체유심조'라는 마음 세계의 법칙을 외면하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만 집착하여 외부에서 행복을 구하면서 현실 상황을 애써 바꾸려고 하기에 늘 실패하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두뇌의 생각이나 설명으로는 알 수 없다. 오직 수행을 통해서 의식수준이 높아진 사람만이 그 의식수준 만큼의 깊이와 감동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의식수준은 높아지고 본성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더 수준 높고 고귀한 차원에서의 깊은 행복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란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 가장 높은 차원의 행복인 본성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깨달으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고결하고 아름다운 행복 속에 살려함이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 모두를 완전한 행복으로 인도하여 일체생령이 더 이상 관념의 고통 속에 짓눌린 잘못된 삶이 아닌 행복한 참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아무리 화려한 성공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내면의 행복을 창출하지 못한다면 그 성공은 사실 의미도 없고 또 성공을 유지할 수도 없다. 행복의 열쇠는 우리의 사고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다. 성공을 통해서 행복을 만나기보다는 행복을 통해서 성공이라는 열매를 낳는 패러다임으로 말이다. 행복의 파랑새는 멀리 떨어진 외부가 아닌 집안에 있다.

진정한 파랑새는 내가 만들고 내가 가꾸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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