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 교수의 현대건축이야기

▲ 자유센터 출입구는 거대한 곡면으로 남산을 향했다.
우리나라에는 의외로 서양의 신전 같이 생긴 건물들이 많다. 대한제국 황제의 권위를 보여주려 했던 덕수궁 석조전이 있는가하면, 민주주의의 신전이고자 하는 국회의사당 건물이 있다. 이렇게 신전과 같이 생긴 건물이 많은 것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신전의 형태가 지난 수천년간 특정한 국가관이나 이념에 권위를 부여하는 건축적 모델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는 1960~1970년대 반공 이념의 신전이고자 했던 건물이 있는데, 바로 남산에 있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자유센터이다.

장충체육관에서 반얀트리호텔(옛 타워호텔)로 올라가는 왼편에 자리 잡은 자유센터는, 웨딩홀로 리모델링하면서 열주 기둥 사이에 끼워진 아치형태의 유리창살이나 하늘색 페인트로 인해 과거의 영광을 상상하기 힘들다. 원래 자유센터는 대규모 국제회의장과 본부 그리고 숙소까지 갖춘 반공의 성지로 계획이 된 것인데, 그 중에 본부와 숙소만 지어진 것이다. 1962년 국가보조 1억원과 국민모금 1억5천만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우방국들이 반공연맹 조성을 위해 내기로 했던 부담금을 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국제회의장은 착수하지도 못하고, 17층짜리 숙소 건물도 골조공사만 마무리된 채 방치되다가, 국제자유회관으로 한동안 불리다가 새 주인을 찾아서 타워호텔(현 반얀트리호텔)이 됐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자유센터의 출입구가 거대한 곡면의 지붕 쪽이 아니라 남산 쪽이라는 것이다. 곡면이 지붕이 도시적인 맥락의 정면이라면, 반대쪽인 남쪽(높은 쪽)은 건축적인 맥락에서 입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붕을 말려 올린 것은 우리의 처마선을 차용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계단식으로 대지가 올라가기 때문에, 건물의 뒷부분이 보이지 않게 가리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앞뒤가 뒤바뀐 것은, 자유센터가 철저하게 정치적인 연출을 위한 무대를 의도했다는 점이다.
▲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남산 자유센터.
사실 자유센터를 지은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후 반공이념의 맹주가 되기 위한 포석이었다. 당연히 반공 집회를 어떻게 주관하는지가 아주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현재 택배회사가 사용하는 북쪽(낮은 쪽)의 거대한 주차장은 원래 대규모 집회를 위한 공간이었다. 거대한 지붕과 열주가 당연히 그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중앙의 거대한 계단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위쪽에서 후광을 받으면서 등장하는 무대이며, 중앙의 거대한 계단참은 반공의 웅변을 쏟아낼 연단이고, 열주 공간 위에 둥그렇게 뚫린 천창들은 장엄한 무대를 위한 조명 장치인 것이다. 외국 VIP가 거대한 북쪽 계단 앞에서 차에서 내려, 큰 계단을 올라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는 장면을 상상해보면 건축가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김수근의 자유센터가, 프랑스 건축가 르 꼬르뷔제(1887~1965)가 1955년에 인도 샹디갈에 완성한 주의회 건물과 많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정면에 둥그렇게 말려 올라가는 캐노피나 네모난 벽체 형태의 열주 등 아주 비슷하다. 또한 일본 동경대학원 스승이었던 겐조 단게(1913~2005)의 영향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남쪽에 길게 돌출한 캐노피는 겐조 단게의 구라시키 시청사의 캐노피를 닮았는가하면, 북쪽의 거대한 계단은 구라시키 시청사 내부 계단과 느낌이 비슷하다. 또한 김수근이 한국으로 귀국하는 계기가 된 남산 국회의사당안의 사무처 건물은 겐조단게의 카가와 현청사 건물의 외관과 많이 비슷하다. 솔직히 자유센터의 거대한 지붕 곡선은 우리의 곡선보다는 왠지 일본 무사 투구의 곡선 같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30대 초반 김수근이 아직 자신의 건축적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여러 유명 건축물들을 많이 차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유센터는 어떻게 보면 전통과 현대, 일본과 서양의 교차점에서 우리의 건축을 찾기 위한 젊은 건축가의 실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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