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담 교도/노마드개성교당
최근에 출간된 김형수 작가의 〈솥에서 난 성자, 소태산 평전〉은 여느 종교의 경전 해설처럼 위대한 자의 남다른 생애와 이적을 열거하는 영웅서사의 필법을 따라가지 않고, 꿈결처럼 다시 들려온 어린 날의 노랫가락에서 부터 시작한다.

시공을 가로질러 작가는 1891년 조선의 운명이 급전직하로 기울어가던 때, 전남 영광 백수면 길룡리 조부자댁 마름 박성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박처화를 대면한다. 그가 낳고 자란 자리의 역사적 맥락과 칠산바다의 풍광을 비롯한 자연환경이 오래 언급되는 프롤로그와 1장을 오래 곱씹으며 읽어야 소태산 사상의 형성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열린다.

교단의 여러 기록들과 연구서들을 바탕으로 하되 그만의 상상력으로 구슬을 꿴 이 평전에서 작가는 사실주의를 놓지 않으면서도 특유의 문체와 관점으로 사유와 현실을 넘나들며 소태산의 행적을 추적한다. 작가가 마주친 소태산은 '참으로 안타까운 이웃들이 호열자로 죽어가는 참혹한 현장에 발을 딛고 그 지옥도 안에서 '한 생각'을 건져 올린 자'였다.

소태산의 나이 열여섯에서 열여덟 살, 누더기 걸인에게서도 행여 큰 깨달음이 있을까 산신을 찾고 도사를 모시던 때는 일제 강점이 시작된 직후의 궁벽한 전라도 시골이었다. '허무맹랑한지고. 공부가 생사 현장을 피해야 쓸모를 얻는다면 그 한심한 짓을 어디에 쓰려고 배우리오.' 소태산은 강증산이 죽는 시점에서 구사행(스승을 구하는 것)을 칼로 베듯이 싹둑 자른다.

그 이후 1910년대 초반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작가는, "소태산의 생애에 거룩한 아우라가 드리우게 하는 것은 스무 살에서 스물다섯 살에 이르는 대절망의 세월을 버텨낸 처절한 고독의 냄새다"고 썼다.

나라를 잃고 부친까지 돌아가신 뒤끝이니 나라 잃은 설움과 한 인간의 몰락과 한 가정의 파탄이 동시에 온 그때에 소태산은 임자도 타리 파시에 출행하여 묵은 빚을 갚고 구도자의 마지막 관문을 넘기 위한 외로운 삶을 시작한다. 끝없는 의심과 불안과 공허감에 육신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1916년 깊은 입정 상태에서 박처화가 크게 깨우치는 순간을 평전은 박용덕의 표현으로 전한다.

"그것은 어떤 것도 아니면서 또한 모든 것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주 가까이, 바로 곁에, 자신 안에 있었다."

김형수 작가는 1916년 4월 28일을 '두 하늘의 경계를 넘은 날'로 기록한다. 누추하고 좁다란 방, 길룡리 노루목의 오두막집에서 한 새벽에 처화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서 눈을 떴다. "썩은 고목의 새순처럼 낡은 몸을 빠져 나왔다."

이후 소태산이 어떻게 방언조합을 통해 교단을 일으키고 노동과 구도가 일치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가가 소상히 적혀 있다. "박처화가 있고자 하는 자리는 신성의 자리가 아니었다. 때는 조급한 예언들이 난무하는 사이비교주의 활극시대에서 자신(교주)의 인격체를 신격화하던 선천종교의 시대로부터 그는 일찌감치 벗어나버렸다." 지독한 가난의 땅, 전라도의 변방에서 소태산은 손수 삽을 들고 등짐을 져 나르며 개펄을 농경지로 만들었다. 심산오지로 들어가는 불교나 신종교들이 부유한 화주나 신분 높은 신도를 선호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또한 작가는, 소태산이 대각 이후 읊조렸다는 '호남공중하처운 천하강산제일루(湖南空中何處云 天下江山第一樓)'라는 짧은 시에서 당대 역사의 핵심을 뚫어버린 각성을 제대로 보여줬다고 썼다. '호남의 허공 어디에 있어도 천하강산이 한눈에 보이는 제일의 누각이 아닐 수 없다'는 외침은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가장 높고 고귀한 자리에 있다는 전복의 사상이다. 가장 슬픈 곳에서 내려다보아야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치가 한눈에 보인다는 이 말씀이 동학혁명의 발상지요, 수많은 농민이 학살된 호남, 아비규환의 땅에서 폭풍우처럼 휩쓸고 간 상처의 뒤끝에서의 깨달음을 압축한 것이었으니 얼마나 깊고 큰 말씀인가.

이번 평전이 갖는 미덕은 소태산의 이야기를 말씀이 놓였던 구체적인 배경 속에서 다시 들려준다는 것이다.

소태산이 항상 '보편'이 아니라 '구체'를 말했다는 점을 그는 풍부한 일화를 맥락 속에서 설명함으로써 제 위치를 찾아준다. 그것은 면벽수도가 아닌, 선농일치의 길이었고 구도를 일상의 삶에서 찾아 제 위치에 돌려놓는 일이었다.

"그는 현실세계 자체를 중시하였다. 세상이 바로 경전이라 설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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