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산 한정석 원정사가 6월23일 열반했다. 발인식 후 총부를 떠나는 운구행렬.
석산 한정석 원정사님!

수수한 옷차림과 소탈한 웃음으로 우리 마음의 고향인 중앙총부와 학문의 전당인 원광대학을 매일같이 오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연한데, 지금 이 순간 저희는 살포시 입가에 자비 미소를 머금으신 스승님의 영정 앞에서 마지막 석별의 인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나는 바람결에 건강이 여의치 않다는 소식은 간혹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저희 곁을 떠나실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못한 터라, 스승님께서 오가시던 교정의 낯익은 풍경들과 후학들을 위해 열변을 토하시던 강단이 오늘은 더 허전하고 쓸쓸하게만 느껴집니다. 생각해보면 스승님께서는 남달리 더위를 많이 타셔서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피서를 떠나시곤 했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조차 여름이 시작되는 초입이라 문득, 아마 찬바람이 도는 가을 어느 날 환한 웃음으로 다시 오실 것을 암시하는 무언의 약속은 아니실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습니다.

석산 원정사님!

그칠 줄 모르던 원불교학 수립에 대한 열정도, 끊임없이 샘솟던 후학들에 대한 사랑도, 일희일비로 동고동락하던 그리운 인연도, 오랜 병고로 지칠 대로 지치신 심신도 모두 다 내려놓으시니 이제 조금은 편안해지셨는지요? 돌이켜보면 스승님께서는 무아봉공의 서원일념으로 이 회상에 입문한 후 일평생 교단 발전을 위해 오롯하게 헌신 하신 자랑스러운 우리 회상의 전무출신이셨습니다. 17살 어린나이에 어머님을 여읜 뒤 그 지극하셨던 효성일념을 일체중생을 위해 살고자 하는 무아봉공의 서원일념으로 돌려서 전무출신의 길에 들어선 이후, 산업부 등지에 근무하며 주경야독의 힘겨운 생활을 온몸으로 견뎌내면서도 훗날 그때가 전무출신 생활 중에서 가장 오롯하고 행복했던 희열에 찬 시기였다고 회고해 주신 일은 저희들에게 전무출신의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신 소중한 가르침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석산 원정사님!

스승님의 열반을 당하여 불현 듯 스승님의 법명과 법호를 새겨보니 스승님의 법명과 법호에는 적어도 정산 종사님의 특별한 통찰과 예지가 숨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를 정(正)에 풀 석(釋), 그대로 직역하면 '바르게 해석 한다'는 말씀인데, 약관의 나이에 이 회상에 찾아든 원정사님을 처음 보시고 어쩌면 그 일생을 법명 하나에 온통 다 담아주셨을까 그 혜안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스승님께서는 기필코 이름값을 하시고야 말겠다는 듯 원불교학의 토대가 거의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창립기에 종교를 넘나드는 활발한 연구활동으로 오늘날 원불교학의 토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 기초를 튼튼히 닦아주셨습니다. 동산선원 재임시절에 스승님께서 낮에는 강의를 하고 밤에는 연구를 해야 하는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연구에 몰두하며 쓰신 '정전노트'는 교단 최초의 정전 종합해설서로서 후학들이 공부 길을 잡아나가는데 소중한 나침반이 되었고, 퇴임을 전후하여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발간하신 '원불교 정전해의'와 '원불교 대종경해의', '원불교교사' 등은 지금도 스승님의 뒤를 따르는 공부인들이 반드시 읽어야할 필독서가되었습니다.

석산 원정사님!

돌이켜보면 스승님께서 걸어오신 80여 성상의 발자취가 어디 비단 이뿐이겠습니까? 스승님께서는 원불교학의 정립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범한철학회, 한국동양철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시며 불교와 유교를 넘나드는 굵직한 학문적인 성과들을 이루어 내셨을 뿐만 아니라, 원불교와 불교의 관계를 정립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화이불류의 정신을 바탕으로 원불교의 독자성을 확보해 나가는데 논거를 마련해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후학들에 대한 속 깊은 애정이 있으시어 한때는 예비교역자들의 기숙사인 서원관에 10여년을 함께 기숙하며 동고동락의 생활을 하시기도 하셨고, 공부 길을 물어오는 제자들을 보면 가지신 것을 온통 다 전해주시려는 듯 '이제 이해가 되느냐? 이제 알아 듣겠느냐?'를 무한 반복하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시고 즉석 강의를 해주시곤 하셨습니다.

스승님! 언젠가 인과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를 묻는 막내 따님의 느닷없는 질문에 '저 일원상을 보아라.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이냐?' 하는 대답을 해 주셨다지요? 생과 사의 이치도 이와 같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오늘의 이별이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임을 믿사옵기에 두어줄 고사로 이제 그만 석별의 정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석산 한정석 원정사님 이승에서 못다 이루신 유업들은 이제 저희 후진들이 힘써 노력해 나가겠사오니, 가족과의 인연도, 교단에 대한 걱정도 모두 다 내려놓으시고 이제 지치신 심신 피안에서 잠시 편히 쉬시옵다가 일원대로 영겁법자, 일원회상 영겁주인으로 이 회상에 다시 오시어 성불제중 제생의세의 대업을 원만성취하는 대 성자가 되시옵소서. 석산 한정석 원정사 존영이시여! 조감하시옵소서!

원기 101년 6월 25일
교단대표 김도종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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