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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전쟁 속에서 희망 놓지 않았다
가난과 전쟁 속에서 희망 놓지 않았다
  • 강법진 기자
  • 승인 2016.07.15
  • 호수 1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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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제환 교도는 화천에서 태어나 분단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다. 한국전쟁 당시 그가 한국군과 북한군에 끌려가 받은 고초는 그의 삶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1932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난 그는 6.25전쟁 한복판에서 10대의 마지막을 보냈다.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 할 정도로 험난한 삶의 여정을 겪었던 그는, 수많은 죽음 앞에서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힘든 삶의 고비 고비를 뚜벅뚜벅 걸어온 남부민교당 송제환(85) 교도.

그가 들려주는 한국전쟁 당시 38선 사이에 놓인 남북의 현실은 참담했다. 그 전쟁터에서 맨몸 하나 건사한 그가 85세인 지금도 전기공사 현장에서 감리를 맡고 있으니 삶이란 알 수 없는 일이다.

7일 익산성지 구 종법실에서 만난 그는 3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휴전 후 60여 년이 넘도록 혼자서 품고 왔던 그 시절 그의 삶은, 지난해 1월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아 국가유공자증서를 수증했다. 또 올해 6월7일 국가보훈처장으로부터 호국영웅 기장증을 받았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아픈 그 시절을 다시 꺼내고자 한 데는 민족상잔의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화천에서의 어린 시절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용호리에서 1남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졸업 때까지 학교에서 한글을 배울 수 없었다. 더구나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은 엄두도 못냈다.

그리고 1945년 8.15광복을 맞았다. 기쁨도 잠시, 화천은 이북 땅이 되고 말았다. 그는 "당시 분단이 실감이 안 났다. 내가 부러운 것은 중학교 다니는 친구들이었다. 친구에게 국사책을 하나 얻어 풀을 매거나 나무하러 갈 때 들고 가서 틈만 나면 소리 내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글로 수업하던 친구들이 중학교 2학년이 되니 영어를 배운다는 소식에 그는 용기를 냈다. 다짜고짜 중학교 교장을 찾아가, 자신도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당찬 그 태도에 교장은 초등학교 졸업증명서 하나로 그를 입학시켰다. 그는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미군이 버린 깡통을 오려 중(中) 자를 써서 붙이고 다녔다"고 한다.

화천발전소, 기회이자 위기

그의 호기심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학교 가는 길에 어느 날, 화천발전소에 기술학교가 생기는데 그곳에서 학생들을 뽑는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그는 그 길로 지원서를 냈다.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그는 그때를 '역경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곳은 기술학교가 아닌 1년 과정 기술양성소였다. 지원자 대부분이 20~30대 청년들이었고, 10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시험을 보러 간 곳에서 감독관의 눈에 띈 그는 최연소 합격자로 입학했다.

합격 통지는 전보로 전해왔다. 며칠 후 그는 이불 하나, 요 하나, 옷가지 몇 개를 싸들고 화천발전소에 입소했다. 그는 "시골에서 등잔불만 보고 살던 내가 거기에서 처음으로 전깃불을 보게 됐다. 정신이 번쩍 났다"고 한다.

1년 동안 기술교육에 매진한 그는 1회 졸업생으로 화천발전소 기계부서로 배치 받았다. 하지만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대치된 상황이라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돌아가면서 경비를 서야 했다. 그의 차례가 돌아온 날 밤이었다. 그는 경비를 서다가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그 사이 총과 함께 쥐어준 고무줄로 된 경비증을 순사들에게 빼앗겨 버렸다. 잠에서 깼을 때 그는 두려움에 떨었다. 어떠한 처벌이 내려질지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겁에 질려 그 길로 집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38선 넘어 이남으로 도망가려 한다"고 말하고, 그날 밤 옷 보따리만 챙겨 밤새 도망간 곳이 춘천이었다.
▲ 그는 전쟁 피난길에서 새끼발가락 하나를 잃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피난 시절

그는 "막상 남으로 오니 내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혼자 이남생활을 하며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하루는 남의 집 농사일을 하고 있는데 이북(화천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당시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서로 총 쏘는 일이 다반사라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포알이 그의 앞에 떨어졌다. 논바닥에서 미루나무 같은 물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아이고, 큰일 났구나. 이북이 쳐들어오는 구나' 하고 알아차렸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북한군은 하루 만에 원주며 동해안 일대까지 점령하고, 3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그는 자신이 이북에서 온 것을 들키면 꼼짝없어 죽은 목숨이란 생각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그가 잡힌 건, 어느 집 김칫독에 숨어 있는 것을 동네 사람이 고자질해 발각되면서다. 그는 북한군에 끌려가 혹독한 훈련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낙동강까지 밀고 들어갔던 북한군이 UN 연합군에 밀려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대열이 화천까지 이르자 그는 그 틈을 타 고향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고향은 이미 폐허가 됐고, 부모는 찾을 길이 없었다.

가까스로 부모와 연락이 닿았지만 한번 탈북을 감행한 그는 마을사람들 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산속 깊숙이 바위틈에 숨어 4개월을 버텼다. 총알보다 더 무서운 맹추위를 견뎌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한국군이 승전하자 그는 하산했다.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되는가 싶었다. 마을에서 한국군에게 발각된 그는 지난 2년간의 행적을 낱낱이 보고했다. 탈북 청년이라 하니 한국군에게는 더 없이 좋은 재목이었다. 그 길로 그는 정보부대에 끌려갔다. 이를 "화약을 들고 불구덩이에 들어간 격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날부터 그는 대대장과 함께 북한 지도를 샅샅이 훑으며 공부했다. 그의 임무는 적군 진영에 몰래 들어가 중공군의 동태를 파악해 오는 것이었다. 안 가도 죽고 가도 죽는 길, 그는 총알이 쏟아지는 전쟁터에 몸을 던졌다. 적군 진영(풍산)에 다다랐을 때 그는 얼어버렸다. 산 밑에 중공군이 쫙 깔린 것이다. 금방이라도 총을 쏠 것 같은 태세였다. 그때 그의 뇌리에 중국어 한마디가 스쳤다. 38선 넘어 중국집에서 일을 할 때 배운 "여러분 수고하십니다"라는 인사말이었다. 그 한마디가 그의 목숨을 살렸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중공군 진영까지 들어가 북한 주소가 적힌 증거품(부고장)을 들고 다시 남하했다. 부대를 떠나온 지 열흘이 지났다. 하늘은 폭격으로 연기로 뒤덮이고, 땅 밑은 화약 냄새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자신도 어떻게 그 사지에서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단다.

그가 다시 한국군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총알 파편에 찔려 오른쪽 발 새끼발가락은 떨어져 나가고, 식도에는 파편에 긁힌 상처가 선명했다. 옷은 다 헤지고 발가락에는 피가 고여 있었지만 정신없이 도망쳐 오느라 그는 아픔을 알지 못했다. 부대에 증거품을 내밀었을 때 대대장은 깜짝 놀랐다. 부대에 계속 남아 달라는 대대장의 말에 그는 단호하게 고향을 선택했다.

그렇게 고향을 찾아 왔지만 마을도 가족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원주로 피난 간 뒤였다. 그는 피난민 수용소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화천발전소 임원에게 발탁돼 고등학교 학업을 수행하며 북한이 남기고 간 화천발전소를 3년 동안 복구작업 하는 일을 도왔다.

이후 친구의 제안으로 교사시험에 도전해 한동안 강단에 섰지만, 전쟁 중에 입은 후유증으로 오래 버티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덕에 그는 젊은 시절 익힌 전기기술로 아직도 현장에서 전기공사 감리를 맡고 있다.

원불교와의 만남, 딸의 출가

화천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다. 그는 학생들이 토요일마다 학교를 빠져나가는 것이 이상해 따라가 보았다. 그곳은 화천교당이었다. 그곳에서 문국선 교무를 만나 원불교에 입교하고 후일 딸(송지은 교무)의 출가까지 도왔다. 그는 "정신개벽만이 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성실한 교도생활은 하지 못했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감사심과 희망을 놓지 않았던 마음이 지금의 그를 탄탄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갈고 닦은 그의 삶의 흔적이 눈빛에 어려 깊고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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