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생, 일원대도 진리공부에 정진할 것"
정산종사께서 지어주신 소중한 법명
금암봉 옛 남원교당 범종 되찾아 오고파

말복을 향해가는 8월의 어느 무더운 날, 오롯한 신심으로 남원교당 창립부터 함께해 온 교도를 소개받았다. 내리쬐는 햇살과 연일 계속되는 폭염 속에 휴가를 떠나는 이들로 고속도로는 요란스럽기만 했다. 남원교당 거산 고경원(91·居山 高敬圓) 교도를 만나러 한걸음에 달려가자 시원한 미소로 그가 반겨주었다.

"유교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어머니는 불교를 신앙하시고 절에 다니셨죠. 마을에서 산길로 8km 거리에 있는 귀정사(歸政寺)에 어머님을 따라 6세 때부터 다녔고, 스님도 집에 자주 내왕한 것으로 기억해요. 불법이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인데도 사찰에서 수도하는 스님들을 일반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는 원기26년 그의 직장인 익산 천일 후라이바에 자주 출입하던 보화당 약방 공산 송혜환(宋慧煥) 선진과 함께 대종사를 처음 만나게 된다.

"제 나이 16살, 송혜환 선생께서 대종사님을 모시고 오셨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라서 일본 경도를 방문하실 준비 중이셨고, 국민복 차림의 인자하신 모습이었죠. 당시에 불법연구회라 호칭하던 원불교는 쉽게 불법을 접할 수 있고, 현대화된 생활종교임을 알게 되어 여건이 허락되면 언제든 원불교에 귀의할 것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당시 연중무휴의 직장을 다니던 그는 법회에 출석할 수가 없어 입교를 하지 않은 채로 익산 총부교당과 고향 남원교당 법회에 참석했다. 그 뒤 원기34년 4월24일 원광중학교 김서준 교사의 연원으로 남원교당에서 입교하게 됐다.

"그 시절 남원교당은 금암봉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정산종사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5개월 동안 남원·산동교당으로 요양을 오셨는데, 그 때 직접 훈증도 받았습니다.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을 뵙고 나니 원불교를 열심히 다니면 풍채도 좋고 인자한 얼굴을 가질 수 있나보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법명이 명철(明徹)이었는데, 법명이 속명같다고 정산종사께 말씀을 드렸고 경원(敬圓)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아내도 입교를 하고, 김충원(金忠圓)이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그 후 오롯한 신심으로 남원교당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해오던 그는 원기54년 범종조성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게 됐다.

"원래 교당에 좌종이 있어 금암봉에서 조석으로 종소리를 울렸는데, 오래된 탓으로 훼손됐습니다. 이에 범종조성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2년만인 원기56년에 2층 건물의 종각을 준공하고, 무게 1000근의 범종을 조성해 범종사업을 완성했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 금암봉에서 조석으로 성음을 울려오다가 금암공원이 남원시청으로 귀속되면서 원기70년 범종을 중앙총부로 이관했고, 현재는 수계농원에서 보관 중입니다."

원기53년 남원교당 교도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원기56년 원불교반백년기념사업회 재정위원, 원기68년 대종사탄생100주년기념사업회 재정위원, 중앙청년회 지도위원, 중앙원덕회 운영위원, 남원교구 원우회장, 남원교구 교의회의장, 남원교구 원덕회장 등을 역임했다.

"금암봉에 있던 남원교당은 공기가 맑고 환경도 좋았지만, 교통이 불편하고 높은 계단이 있어 연로한 교도들이 법회 참석이 힘들었습니다. 원기65년 시내로 이전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기금 조성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기금이 턱없이 부족했고, 당시 8500만원을 호가하던 남원시 하정동 3번지 대지 483㎡에 건평132㎡의 대지와 건물을 희사하게 됐습니다. 이에 남원교당을 시내 중심가로 이전해 원기66년 5월 성대한 봉불식을 거행했죠."

원기66년 거산(居山)이라는 법호를 받고 원기82년 정식법강항마위에 승급한 그는 각급 훈련과 유적지 순례, 대소행사 등 법회출석에 성실히 임했다. 남원국악원장에 두 번이나 당선됐으나 사양했으며, 일평생을 국제로터리클럽 봉사와 원불교 신앙생활에 충실해 온 그다.

"원불교를 만나고, 대종사님과 교법을 알게 됨을 지극히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공부한다고 했지만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정산종사님께 법명을 받고, 대산종사님이 남원 지역 순방에 다니실 때 직접 차로 모시고 다니던 일 등 부족한 저를 늘 사랑으로 보살펴 주신 데에 무한한 감사를 느낍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살아있는 동안 총부에 자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남은 여생 동안 일원대도 진리공부에 더욱 정진하고 싶다는 그는 마지막 숙제로 금암동 옛 남원교당 범종을 되찾아오는 일과 원불교 신앙생활을 정리한 회고록 발간을 꼽았다.

"금암봉에서 조석으로 울리던 종소리가 그립습니다. 그 때 당시 원불교에 다니지 않던 사람들도 금암봉 종소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범종을 조성할 때 교도들 뿐만 아니라 남원시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았습니다. 지금 수계농원에 있는 범종을 되찾아와서 금암봉에 다시 걸고 싶습니다. 또 자손들에게 이 세상 왔다갔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지난해부터 책자를 준비해 현재 초안을 완성했습니다. 원불교 신앙생활에 충실해 온 것이 항상 은혜롭고 감사하며 후회없는 생활이었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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