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위안부 문제 1963년 일괄타결 했다
또한번의 굴욕협상 '배상금' 아닌 '치유금'
진정한 화해·치유는 사죄로 부터 시작해야

▲ 한국과 일본이 추진하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협상에 국민들이 반대시위에 나서며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
화해·치유재단 출범

여성가족부가 7월28일 '화해·치유재단'의 출범식을 열었다. 이 단체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대변해 일본정부가 출연하는 10억엔을 기반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목적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협정이 이뤄지고 7개월만에 재단설립이 되고 정부는 현재 일본정부와 최종결정에 들어갔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해 지난해 12월28일 한·일 협정으로 약속한 '화해·치유재단'에 대한 10억엔 출연을 이달 안에 마치기로 한국 정부와 합의한 것으로 12일 알려졌다. 또 출연금의 성격은 '배상금'이 아닌 '치유금'으로 규정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간 한·일 정부간에는 일본이 내기로 한 10억엔에 대한 해석 차이가 있어 10억엔 출연이 실현되지 않았다가 이번에 결정된 것이다. 정부는 10억엔이 일본정부의 예산이므로 일본이 사실상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정부의 자의적 해석일 뿐 일본의 입장은 다르다.

일본 정부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에 관한 배상은 1963년 한·일수교과정에서 이미 종결된 것이므로 위안부 문제도 1963년에 모두 일괄타결 했다"는 주장이다.

이번에 지급하는 10억엔은 "배상이 아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로써 보다 나은 한·일관계 발전을 위한 사업 지출이다"고 말했다. 어찌됐든 정부는 일본과 합의함으로써 위안부 문제는 한·일 정부차원에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종결됐다.

위안부 합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

우리 정부는 일본 측에서 배상의 책임을 갖고 배상금을 내 주었으니 그것이 그들의 잘못을 인정했다고 해석하고 있으나, 일본 측의 합의 조건을 보면 사과를 하기 위해 합의에 참석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양국은 이번 협정에서 '불가역적으로 해결'이라고 합의했는데, '불가역적' 즉 본래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뜻으로 위안부 문제는 더 이상 언급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베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해 한·일 협정 직후에 한 언론을 통해 "우리 후손들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계속 사죄할 숙명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일본의 NHK방송도 "일본 정부가 가장 중시한 것은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지 않게하자는 것이었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일본의 입장은 자신들의 역사에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 조건으로 돈을 주겠다는 내용이며, 우리 국민들이 공분하는 이유는 일본이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는 데 우리 정부가 직접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과 일본의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협정이 이뤄지려면 일본의 사과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강제 동원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사죄해야 한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은 이번 합의자리에 배제해 놓고, 국민들의 여론에 전혀 소통이 없이 강행됐다는 점에서 정부의 이번 협정은 시작부터가 문제였다.

또한 이번 협정의 조건에 보면 일본은 '10억엔을 치유금으로 주는 대신 국제사회에의 공식 비난을 더 이상 말라. 소녀상을 이전해 달라. 위안부 사실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에 등재하지 말라'등의 요구를 내세웠다.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 정부는 10억엔을 받고 일본의 이 같은 요구를 모두 들어준 셈이다.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정리

이번 위안부 피해자 합의문제 말고도 일본과의 모든 과거사 문제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부터 거슬러 봐야 한다. 한 예로써 한·일기본조약을 살펴보면 조약의 내용 중 제 2조의 불합리를 들 수 있다. '제2조.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약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조항이 있다.

1910년 8월22일은 대한제국 내각 총리 대신 이완용과 일제통감 데라우찌의 조약이 있었다. 우리가 흔히 한일합방이라고 알고 있는 '한·일강제병합' 조약이다. 이후 8월29일 경술국치로 알려진 이날이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강제 병합되어 말 그대로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 일본의 강압으로 이뤄진 이 조약은 처음부터 무효임을 고종황제가 선언했고, 직접 필서를 써 각 열강들에게 보냈으나 이후 고종황제는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했다. 따라서 한일강제병합은 처음부터 합의가 아닌 병탄으로 이 조약은 잘못된 것이다.

일본 측이 한·일기본조약 때 내세운 '무효'라는 뜻은 '처음부터 잘못된 조약이니 이것은 무효다'가 아니라, '한·일간 맺었던 모든 조약을 독립된 나라로서 정부수립을 한 1948년 8월15일부로 그 효력이 다한 것이니 무효로 한다'라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일본은 역사적으로 한·일간의 강제병합을 인정하지 않았고, 우리는 지난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에서 일본의 이러한 협정에 함께 승인했기에 결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에 적극적으로 대응 할 수 없게 됐다.

당시 우리 정부는 한·일협정 이후 경제 원조자금(배상금이 아닌)이라는 명분으로 6억달러(무상 3억달러, 차관 3억달러)를 받았고, 일본의 침략 사실 인정과 가해 사실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선행되지 않았으며, 청구권문제, 어업문제, 문화재반환문제 등에서 우리 정부 측의 지나친 양보가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됐다. 때문에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의 반대시위가 일어났고 이 반대운동은 일반 시민에게까지 번져 결국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번 위안부 피해자 문제도 당시 한·일기본조약 중에 맺어진 '청구권문제'를 들어 일본은 이미 수교과정에서 종결됐으니 다 해결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후에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한·일강제병합은 무효임을 증명하며 한·일기본조약 2조의 모순을 지적해 '한·일병합'이 협박과 기만에 의해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강제점령이었다고 주장,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국제법상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의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일 양국 간에 교차되는 이런 명암과 시비는 궁극적으로 '과거사' 처리의 원점, 곧 한·일회담과 한·일조약에서 비롯된 바가 많다. 따라서 오늘날의 한·일 관계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일 양국의 국민이 한·일회담과 한·일조약의 추진 과정, 주요내용, 파급효과 등에 대해 정확한 지식과 균형 잡힌 인식을 갖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
▲ 소녀상 앞에서 진실을 요구하는 피해자 할머니.
풀어야할 과제로 남겨진 역사

한·일기본조약 체결의 결과는 일본이 자신들의 역사 속에 자행된 한·일강제병합과 식민정책에서 나왔던 위안부문제, 수탈과 강제징용 등의 사실들을 부정하고 또는 합의에서 이뤄진 합당한 처사임을 주장하는데 힘을 보태줬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도 이 한·일기본조약의 합의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것이다. 일본이 우리에게 끔찍한 역사적 잘못을 저지르고도 저렇게 국제사회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도 근거도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이번 위안부 문제에서도 또 한 번 똑같은 과오를 행했다. 과거 박정희 정권 때 경제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역사적 문제와 민족의 혼을 돈으로 매각해 버린 실수를 이번에 또다시 저질렀다. 이 통한의 가슴아픈 상처를 정부가 나서서 국민들에게 줬다.

진정 화해와 치유를 원한다면, 정부가 그런 의도가 분명하다면 잘못돼 어그러진 진실의 역사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과거사 해결의 문제는 상당이 많은 숙제가 남아있다. 지금의 실수는 결국 훗날 우리 후손들에게 무능한 선조들의 모습을 남겨주는 것이며, 앞으로의 해결해야 할 너무나도 큰 과제를 물려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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