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의 힘

▲ 도형래 교도/서울교당, 한국인터넷기자협회
마을과 마을, 집과 집을 잇는 게 길이다. 인적 외딴 시골 마을에서는 여름에 한 번 씩 산길을 닦아낸다. 산 너머 마을에 가는 길이 여름에 거친 생명을 지닌 잡풀들이 자라며 길의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람들이 모여 살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면 자연스럽게 길이 생긴다.

하지만 길이 먼저인 동네들도 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주변에 생겨난 마을이다. 서울을 앞두고는 '새술막'이라는 동네이름이 눈에 잘 띈다. 수원, 과천, 포천 등지에 있는 새술막은 술막(주막)이 들어서면서 새로 생긴 마을을 말한다. 서울 가다가 잠시 쉬어가거나, 하루 밤 묵어가는 술막을 가운데 두고, 술막에 식재료를 납품하거나, 길손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이들이 모여 생겨난 마을이다.

새터말이나, 새말이라는 지명도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한자말로 신기(新基), 신대(新垈), 신촌(新村)이라고 쓰기도 한다. 서울 신촌 역시도 이렇게 생긴 동네다. 신촌은 서대문밖, 영등포로 가는 길에 있다.조선시대 말까지 고양군 연희면의 한 자락에 불과했지만, 의주선 신촌역과 연희전문, 이화전문이 설립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곳이 됐다고 한다.

이들 새술막, 새터말의 공통점은 길이 마을 보다 앞서 생겨난 동네다.

47번 국도는 철원에서 시작해 서울 왼쪽을 관통해 안산까지 가는 도로다. 서울로 가는 길 가운데 가장 많은 마을을 만들어내고 있는 길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인지 대부분이 왕복 4차선이나, 8차선 이상으로 너른 길을 자랑한다. 47번 국도 한 자락인 영동대로는 우리나라에서 세종로 다음으로 넓은 길이라고 한다.

철원에서 시작해 포천을 지나는 47번 국도는 광덕산, 백운산, 운악산, 국사봉 같은 수려한 산새를 끼고 돌아 내려오다 왕숙천변 길을 이룬다. 그러다 광릉내나 진접에 가까워 오면 아파트 회색 벽을 만들어내는 광경을 마주하게 한다. 여기서부터 무슨 단지, 무슨 지구 등이 퇴계원을 지나 서울에 들어설 때까지 기경을 이루며 이어지고 있다. 구리, 남양주, 퇴계원으로 이어진 서울 밸트가 지금은 광릉-진접까지 넓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국도 주변 초록 산 사이에 올라서는 회색 벽들은 마치 SF 영화 속에 나오는 멸망 후의 지구의 모습처럼 괴기스럽다.

별내를 지난 태릉으로 이른 47번 국도는 장안평-군자-성수동에서 영동대교로 이어지는 동일로가 된다. 서울 영동대교를 지나 만나는 영동대로 역시 47번 국도의 한 자락이다. 서울 강남, 가장 번화한 곳을 지나기 때문에 서울 가는 길 위에 도시가 들어서고 있는 모양새다.

서울 삼성동, 대치동, 양재동을 지난 47번 국도는 과천과 만난다. 서울 남쪽 47번번 국도는 이미 신도시 개발이 끝난 곳이 많다. 하지만 신도시와 신도시 사이 예전에는 녹지나, 노지로 남아 있던 곳이 새롭게 개발되고 있다. 47번 국도 옆 과천으로 들어서는 우면산 남쪽에도 서울시가 서초 보금자리주택 지구를 건설하고 있다.

47번 국도는 과천에서부터 인덕원, 안양, 의왕으로 이어지는 옛 삼남길의 자취를 따른다. 삼남길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선비들이 한양에 과거보러 가던 길이지만, 지금은 옛 정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47번 국도 왼쪽 청계산 자락은 과천부터 이어진 아파트 벽이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가려있고, 반대쪽 관악산은 아파트 방음벽 위로 봉우리 몇 개와 그 위 솟은 방송탑만 내보이고 있다.

47번 국도는 서울 북쪽으로 갈매, 별내, 남양주, 퇴계원, 진접까지 대단위 아파트단지를 만들고, 남쪽으로는 우면산 지구부터, 과천, 의왕, 평촌, 산본 신도시를 좌우로 거느리고 있다. 그러다 안산에 이르러 수리산푸른 자락을 내보일라 치면 47번 국도는 39번국도로 이어지며, 자신의 이름을 거둔다.

47번 국도에서 유일하게 푸른 산자락을 볼 수 있었던 군포와 안산이 만나는 곳, 대야미 일대도 현재 덤프트럭이 오가며 녹지를 걷어내고 있다. 군포 송정공공주택단지라는 이름의 주택단지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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