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핵발전소 현황과 문제, 그리고 탈핵운동의 대안을 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아울러 고준위 핵폐기장 건설과 영광 한빛원전 폐기물 처리 문제에 대한 위험성 등을 짚어본다. '핵발전소, 사후 대책은 없다'를 주제로 4주에 걸쳐 탈핵전문가 특별인터뷰와 기고의 글을 싣고, 원불교 탈핵의 역사와 현장을 찾아가 본다.

1주 탈핵전사 김익중 교수 특별인터뷰
2주 황대권 대표의 핵폐기장 건설 문제점
3주 원불교탈핵의 역사와 미래대안
4주 200회 탈핵순례현장을 찾아서


 

▲ 핵폐기장 백지화 범부안군민 대책위원회 공동의장을 맡은 김인경 교무(오른쪽 두번째)가 기자회견을 했다.
교단의 반핵, 탈핵운동은 시민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인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평가를 받은 배경은 단순히 반핵, 탈핵운동에 그치지 않고 대안적인 모델을 제시하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반핵, 탈핵운동이 영광 원자력발전소 안정성 확보와 5,6호기 저지 활동, 천지보은회 창립, 영광 핵폐기장 건립 반대운동, 부안 핵폐기장 건립 반대운동이었다면 탈핵 생명 평화 순례와 100개 햇빛발전소 건설 운동은 그 대안적 실천 운동이라 정의할 수 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촉발된 탈핵운동
1986년 4월26일은 인류에게 원자력발전의 위험성과 방사능의 심각성을 일깨워 줬다. 구 소련(현재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면서 원자로 주변 30km 이내에 사는 주민 9만2000여 명이 모두 강제 이주됐다. 그 뒤에 6년간 발전소 해체작업에 동원된 노동자 5,722명과 이 지역에서 소개된 민간인 2,510명이 사망하게 된다. 무려 43만 명이 암이나 기형아 출산 등 각종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전사고는 4월25일 4호기 정기점검을 위해 가동을 중단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4호기에 연결된 두 발전기가 분리되는 사고가 발생해 1차 폭발은 철과 콘크리트로 이뤄진 노심을 파괴, 반응로를 대기에 직접 노출했고, 2차 폭발은 원자로의 콘크리트 천장을 파괴하면서 파편들이 주변 지역으로 즉시 누출됐다. 이어 4호기의 반응로와 3호기 건물의 30개소 이상에서 화재가 발생하며 수차례에 걸친 수증기, 수소, 화학 폭발을 수반한 대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여파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공산주의와 대척하고 있던 서구사회나 아시아 쪽에 영향을 미쳐 원자력 발전의 안정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교단은 원기73년(1988) 원불교대학생연합회 강대훈 회장이 <내릴 수 없는 반핵의 깃발을 위하여>라는 편저로 반핵, 탈핵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 같은 해 12월 영광군에서 '원자력발전소 과연 안전한가'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주제발표와 토론회를 개최했다.

영산성지 수호, 영광 반핵운동
영광 원자력발전소(홍농읍)가 영산성지에서 반경 6km 거리에 있으면서 방사능 누출에 대한 안정성 문제는 영광교구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영광의 반핵운동은 3,4호기 건설 저지, 핵연료 장전 반대, 안정성 확보 촉구, 5,6호기 건설 승인 취소 운동으로 요약된다.

1,2호기에 이어 3,4호기 건설이 시작될 쯤인 원기74년(1989) 3월 '영광핵발전소 건설 저지대회'를 위해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광터미널 광장에서 개최한다. 이 대회에는 체르노빌 원전사고 3주년을 맞아 영광핵발전소 추방운동연합(회장 서단)과 영광군번영회, 원불교대학생연합회, 전남대학생연합회, 영광가톨릭농민회, 광주환경공해연구회, 고창상하농민회, 영광군민들이 주최했다.

원기75년(1990) 12월 반핵평화운동단체를 결성하고 공동의장에 김현 교무가 위촉됐다. 본격적으로 영광 원전 3호기 핵연료 장전 반대시위를 전개하는 동시에 영광 원전 5,6호기 건설계획 철회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원불교청년회와 원불교대학생연합회가 영광 원전 3,4호기 추가건설 반대에 앞장섰다면, 3,4호기 핵연료 장전 반대 및 안정성 확보와 5,6호기 건설 저지는 영광교구, 청년교도들 그리고 지역 종교단체와 주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연대하게 된다.

이때 출범하게 된 것이 '천지보은회'라는 환경단체다. 영광 원전 5,6호기 건설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청년교도들과 교무들이 원기79년 6월에 천지보은회를 만들어 조직을 꾸리게 된 것이다. 당시 영광교구 사무국장이었던 서종명 교무는 본지 기고문을 통해 "허가 조건인 3호기에 현장 실측 시험을 반드시 해야 한다"며 "최초의 한국형 모델인 3호기는 마지막 검사에서 연장 실측시험을 하지 않고 육안검사로 끝내고 1년 후에 가동 될 4호기에 현장 실측시험을 한다는 것은 국민의 생명을 저버린 행위이다"고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면서 3,4호기는 국민의 것이므로 안전성이 투명해야 하나 부실시공의 의혹이 많다고 덧붙였다.

영광 천지보은회와 교구, 청년, 예비교무들은 원전 5,6호기 허가를 반대하는 시위를 영광군청 앞에서 전개하며 성지수호에 나섰다. 5,6호기 건축허가 승인 취소에 대한 성명서 발표, 특별기도식, 삭발식 단행 등으로 강력한 저항을 계속 이어갔다. 그해 3월에는 영광교구 교무들과 천주교 환경사제단, 영광군민 등 1천여 명이 영광핵발전소 3호기 핵연료 저지 선포식을 갖고 거리행진을 벌렸다. 그러나 원기81년(1996) 영광군수가 원전 5,6호기 허가를 내주지 않기로 지역주민과 약속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허가권을 가진 군수가 약속을 저버린다. 이에 9월23일 원전 허가 이후 영광군민 궐기대회를 대규모로 개최했다.

다시 영광, 핵폐기장 유치로 꿈틀
반핵운동의 활동이 잠시 주춤한 사이, 천지보은회는 전북, 서울, 부산, 강원, 대구지부를 신설해 내적 역량을 키우는 한편 원기85년 10월에는 중앙 천지보은회(초대회장 이선종) 창립대회를 개최한다. 다시 뜨겁게 반핵, 탈핵의 물결이 불어 닥친 것은 영광군이 핵폐기장 유치를 선언한 원기88년(2003)도다. 정부는 방사성폐기물 저장고가 곧 포화상태에 이른다고 고시하며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건설을 추진한다. 이에 같은 해 2월 영광군 핵폐기장 반대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영광범군민대책위원회도 꾸리게 되는데 이때 영광교구와 천지보은회, 재가출가 교도들이 전력을 다해 참여하게 된다. 영광교구의 핵폐기장 선정 백지화 100일 단식 기도회, 핵폐기장 반대 국도 점거 시위, 김성근 교무(한국반핵운동연대 공동대표, 핵폐기장반대 영광군민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의장)의 무기한 단식농성 및 청와대 앞 1인 시위, 허종화 교무 외 10명의 일보일배 시위, 핵폐기장 후보지로 선정된 울진, 영덕, 고창, 영광 4개 지역 주민들과 연대 등 다양한 방법으로 반핵의 깃발을 들었다. 특히 3월27일 서울 마로니에공원에서의 '핵폐기장 백지화, 핵발전 추방 궐기대회'는 언론과 시민단체 등에 주목을 끌며 핵폐기장 백지화를 이슈로 등장시켰다. 이 대회에는 전무출신과 교도들 그리고 영광, 고창, 울진, 영덕의 지역주민과 시민환경단체 등 7000여 명이 상경 투쟁에 동참했다. 본지에서는 '핵폐기장 반대! 영산성지를 수호합시다. 교도님들의 성원과 관심이 절실합니다. 영광교구에서는 핵폐기장을 막아내기 위해 핵폐기장 반대 1인1깃발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1개당 1,500원입니다'라는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부안 핵폐기장 반대 운동
영광 핵폐기장 선정이 백지화되면서 끝날 줄 알았던 탈핵, 반핵운동은 곧바로 부안에서 바톤을 이어 받았다. 원기88년 7월 부안군수가 핵폐기장 유치를 선언하자 지역주민들과 종교계는 '핵폐기장 백지화 범부안군민 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공동의장을 맡은 이가 당시 부안교당 김인경 교무(현 수위단회 상임중앙단원)다. 대책위에는 기독교, 천주교를 비롯해 농민회 등 지역단체들이 가세했다. 부안군 의회가 유치신청을 부결했음에도 부안군수는 7월14일 단독으로 위도 유치신청서를 제출해 대책위원회와 첨예한 대립의 각을 세운다.

김인경 교무는 "연일 계속되는 집회 속에 항상 지역민들과 함께 하고, 지역민들의 뜻을 담아 외쳤다. 온몸에 쇠사슬을 묶고 대열의 맨 앞에서 경찰과 대치도 했고, 시위하다가 다친 주민들을 감싸기도 했다"며 "시위 도중에 경찰에 잡혀간 주민들을 위해 경찰서와 군청에 항의하며 협상도 했다. 군민들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참여정부 관계자를 만나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고 말했다. 10월3일 고건 국무총리와 부안 대책위는 대화기구를 설치해 주민투표 중재안을 만든다. 원기89년(2004) 2월14일 원전 수거물 관리시설 건립에 대한 부안군민 찬반 투표가 실시되자 압도적인 반대(92%)로 부결되고 만다. 핵폐기장대책위는 20개월만에 해산됐다.

반핵·탈핵 넘어 오래된 미래로
원불교의 반핵, 탈핵운동은 단순히 반대운동으로 끝나지 않았다. 원기96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이듬해 11월 '제1회 원불교 탈핵 생명 평화 순례'를 영광군청에서 홍농읍 영광 원자력발전소까지(22km) 진행하기 시작했다. 매주 월요일마다 진행되는 탈핵순례는 24일 200회 기념행사를 갖는다. 원기90년부터 시작된 햇빛발전소는 100개의 교당과 기관에 설치돼 가동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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