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권 교도 / 여의도교당
인간의 성품을 놓고 선한가, 악한가라는 질문이 성리 철학 큰 분야의 하나였다. 맹자로부터 성선설이 나왔고, 순자에게서 성악설이 나와 대립했다. 그 뒤 양웅에 의해 성선악혼재설이 나와 성품은 본디 착하기도 하지만 악하기도 하니, 선과 악이 혼재해 있다는 논리가 나오게 됐다.

맹자는 '천명지위성'이라고 하는 〈중용〉의 내용을 계승해 성을 만물에 내재된 하늘의 작용이라 파악했다. 즉, 천명을 중심으로 볼 때 모두 하나라고 하는 만물일체사상을 확립한 것이다. 하늘의 작용이 천지자연의 대조화를 연출하고 있으므로 그 하늘의 작용을 성으로 이어받은 인간도 성의 움직임을 따르면 인간 사회는 저절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의미에서 성선설을 주장했다.

순자의 성악설은 맹자의 성선설과 대립되는 이론이다. 맹자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악을 거부하고 선을 실행하려는 마음씨 즉, 도덕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순자는 사람은 누구나 다 관능적 욕망과 생의 충동이 일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봤다.

우리에게 이러한 측면이 성장하여 서로 쟁탈하는 싸움이 일어나고 사회적 혼란이 생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덕질서가 파괴되는 것을 가리켜 인성이 악하다고 규정지은 것이다. 맹자가 말하는 인성은 사람의 마음씨를 의미하고, 선악은 도덕적 가치를 의미한다.

그런데 순자가 말하는 인성은 욕망을 의미하고, 선악은 사회적 치란(治亂)을 의미한다. 그러나 순자는 인성이 비록 악하지만 인간의 후천적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선한 방향으로 교정할 수 있다고 봤다.

본인은 본래 성선설이 옳다고 생각해온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도무지 성선설이 아니고 성악설이 옳은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든다. 자기 자식을 굶겨 죽이지를 않나 낳아준 부모를 살해하질 않나 꼭 말세가 온 것 같다. 국회에서 송민순 전 외교장관의 회고록 하나를 놓고 여야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을 보면 도무지 인간의 성품이 악한 것 같이 보여 마음이 아프다.

정약용은 말한다. "인간의 정신 속에는 세 가지의 이치가 있으니 성품으로 말하면 착함을 좋아하고 악함은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성선설이 나오게 된다. 형평성으로 보면 착할 수도 있지만 악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선악이 혼재해 있다는 양웅의 주장이 나온다. 행하는 일로 본다면 착한 일은 하기 어렵고 악한 일은 하기 쉽다. 그래서 순자의 성악설이 나왔다."

불교에서는 이 성선설을 '자익익타·자리이인·자행화타·자리이타·자해타리'라는 말로 표현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다 같은 뜻이다. 자리란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노력하고 정진하여 수도의 공덕을 쌓아 그로부터 생기는 복락과 지혜 등 과덕(果德)의 이익을 자기 자신만이 향수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대하여 이타란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의 구제를 위해 닦는 공덕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소승불교에서 지향하는 자리적인 수행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 자리와 이타가 조화를 이루면서 동시에 완전하게 실현된 상태, 곧 자리이타의 원만함이 실현된 세계를 목표로 삼아 수행하는 세계가 바로 대승의 입장이다.

이에 대해 원불교에서는 두 가지 방법을 지향하고 있다.

첫째, 자리이타다. 남도 이롭게 하면서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하는 것이 자리이타다. 대승의 보살이 닦는 수행태도로서, 오직 자신의 제도만을 위하는 성문ㆍ연각의 소승적 자리의 행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리란 자기를 위해 자신의 수행을 주로 하는 것이고, 이타란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자해타리다. 자해타리는 자리이타로 수행을 하다가 만약 자리이타의 길을 가지 못하게 되면 내 이익을 버리고 차라리 타인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정신을 말한다. 사은 중 동포은의 상호관계, 곧 모든 동포 사이는 서로 자리이타의 관계로서, 상호 도움이 되고 피은이 된다. 대종사는 무슨 일이든지 행동에 옮길 때에는 자리이타로 하되, 부득이 한 경우에는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방을 이롭게 하라고 했다.

성품은 행복의 비결이다. 교만한 사람은 행복하지 못하다. 그 이유는 자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감사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다. 내면 깊이 행복한 사람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정직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정직하다는 것은 솔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진실하고 투명하다.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부족함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정직한 사람이다. 행복이란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또한 행복한 사람은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행복이란 욕심을 채움으로써가 아니라 욕심을 다스리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행복이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성숙한 성품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자족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결국, 행복도 성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인간의 성품은 본디 착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솔성 즉, 성품에 따르고, 그 본디의 성품을 높이 받들어 인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다. 막된 일에 가담하여 본성을 잃고 하찮은 이끗에 정신을 잃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서글퍼진다. 그렇게 남을 비방하고 모략하며 악을 행하고 살아서야 어디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뭐래도 인간의 성품은 본래 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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