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도현 교도 / 과천교당
略言如是나 詳擧인댄 非紙墨能窮이라 "대략 말하면 이와 같으나, 자상히 들기로 하면 종이와 먹으로는 다 할 수가 없다"

'좌'와 '선'에 대해서, 즉 자성의 정(定)과 혜(慧)에 관해서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이와 같지만, 이를 상세하게 설명하기로 하면 종이와 먹으로는 다 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평소 눈 코 귀 혀 몸 마음을 통하여 천만경계를 접하는 순간, 즉시 공적영지를 드러내어 쓰는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那伽大定은 無靜無動하고 "나가(那伽)의 큰 정(定)은 정(靜)도 없고 동(動)도 없으며"

'나가대정'은 부처님의 정이라고 합니다. '나가'는 원래 바다 속의 용(龍)을 가리키는 말인데, 부처님의 큰 정을 바다 속 용왕(龍王)의 정으로 비유하여 '나가대정'이라고 한다 합니다.

'부처님의 큰 정(定)은 정(靜)도 없고 동(動)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무시선법에서도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아… 동(動)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靜)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위와 상통하는 내용입니다. 즉, 부처님의 큰 정은 자성의 '정(定)과 혜(慧)'가 동시에 완전하게 갖춰져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성품의 정과 혜는 서로 둘이 아니어서, 텅 비었으되 한없는 영지(靈知)가 있고, 영지가 가득하되 또한 텅 비어있습니다. 즉, 비어있지만 한없이 밝은 지혜가 살아있으므로 정(靜)이 아니며, 천만경계에 응하여 밝은 지혜를 나투지만 그 본체가 또한 공적하므로 동(動)도 아닙니다.

이렇게 자성의 정과 혜가 동시에 원만히 갖춰져서 정(靜)도 없고 동(動)도 없음이 우리 본래의 마음인데, 이 경지를 한결같이 유지(不離自性)하는 일이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잠깐일지언정 누구나 결코 불가능한 게 아니니, 곧 '주한 바 없는 마음'이 되면 가능한 것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겠습니다.

가령, 어른이 불장난하는 어린아이를 혼내는 경우를 봅시다. 아직 어려서 라이터를 가지고 노는 아이를 '미워하는 마음' 없이도, 어른이라면 아이를 혼내줄 수가 있습니다. 짐짓 아이에게 무서운 얼굴로 꾸짖지만, 안으로는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태연합니다. '불을 조심해야한다'는 옳고 그름(是非)은 밝게 알지만, 불장난하는 아이의 '잘못'에 주착하지 않으면 화도 나지 않습니다. 아이를 꾸짖으면서도 마음이 고요하면, 동(動)하여도 동하지 않고, 정(靜)하여도 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곧 정(靜)도 없고 동(動)도 없습니다.

또 옛날 엄마가 아이의 기저귀를 빨 때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똥오줌을 싼 기저귀를 보면 '더러워졌으니 빨아야한다'는 것을 모르는 엄마는 없습니다. 즉 더럽고 깨끗함(染淨)을 밝게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더러움'에 주착하지 않으면, 기저귀를 빨면서도 '괴롭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더러운 것을 만져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고,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어서, 정도 없고 동도 없습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