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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원 도무 교화자의 삶 2. 사은께서 이끌어 주시다
김계원 도무 교화자의 삶 2. 사은께서 이끌어 주시다
  • 김계원 도무
  • 승인 2016.11.25
  • 호수 1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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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98년 중앙총부 반백년기념관에서 출가식을 했다. 원불교학과 졸업 후 10여 년이 지나서다. 출가식이 늦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 마지막 휴가를 고향집이 아닌 한국 공연예술과 서울 대학로에서 보냈다. 당시 대학 다닐 때 총부 서원관에서 받은 은혜들, 그리고 군복무하는 가운데 열심히 갈고 닦은 튼튼한 심신을 가지고 극단 오디션장으로 향하던 힘찬 발걸음이 떠오른다.

대학로는 문화예술교화를 준비해오던 내겐 꿈을 향해 진일보하는 로망의 장소였던 것이다. 대학로 이랑씨어터 극단원으로 오디션 합격 후 부대로 복귀해 동기들과 함께 여단장 면담을 했다. 전역 후 앞으로의 계획들에 대해서 말을 하는데 연극배우를 할 생각이라는 말에 다들 웃는다. 군생활에 적합한 성격을 가졌다며 "이런 놈이 군에 있어야는데~"하는 여단장의 말이 떠오른다.

군 전역 후 익산 고향집에 내려와 단 3일만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바로 서울로 상경해 극단원 생활을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가난한 연극인 생활이 시작됐다. 포스터 부착, 선배 배우들 식사 준비 등 바닥에서부터 해나가기 시작했다. 1년은 무보수, 2년 6개월 동안은 한달에 한번 차비 8만원을 받아가며 현실적으로는 전무출신보다 더 지독한 예술인의 생활을 연명했다. 길거리에서 공연 전단지를 나눠주는데 중대원들과 마주쳐 '여기서 뭐하십니까?'라며 빤히 쳐다보던 눈빛, 포스터 부착하다가 경찰에 잡혀 혜화경찰서 벤치에 앉아있던 기억, 대통령령으로 지정된 문화특구 지역에 포스터를 부착했다고 벌금을 내라는 것에 항의하려고 관련 법규를 공부했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모든 어려움들도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하고, 관객을 마주하며 느끼는 희열에는 비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공연을 하며 약 4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동국대 연극대학원에 들어가서 실전과 이론을 병행하기 시작하며 공연예술 전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소극장 극단원 시절 러시아 연출의 대부인 '스타니슬라브스키(Konstantin Stanislavsky)'의 저서 '배우수업'을 영어 원서로 공부한 것이 도움이 돼 자연스럽게 영어를 습득하게 됐다. 그것이 기연이 되어 공연예술 해외진출 기획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사실은 연기만 해서 먹고 살기 힘든 현실적 문제에 대한 대책도 필요했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이나 영국 킹스톤 연극올림픽 등 해외 공연을 수차례 가서 경험했다. 또 내 연극 인생 1막의 마지막 공연은 셰익스피어 정통 연극 '리처드 3세'로 미국, 영국, 뉴질랜드, 핀란드, 그리고 한국 등 다국적 배우들과 함께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하며 대미를 찍었다.

한창 리처드 3세 공연을 할 때였다. 당시 원불교 사회복지법인 삼동회 이사장인 김명덕 교무님을 만나 연극무대도 좋지만 실제 세계무대에서 교화를 위해 뛰어보자는 말씀을 받들었다. 그것이 현재 삼동회에서 추진하는 '아시아 저개발국가 NGO활동을 통한 교화거점 마련사업'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

연극생활 시작 이후 횟수로 10년 동안 문화예술분야에서 역량을 키우고 나니 사은님의 근본적 진리와 가르침에 회귀하고 보은해야 할 때라는 직감이 들었다. 더불어 전무출신을 서원한 자로서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까지 들었다.

주위 분들의 기운과 소소한 재주가 맞물려 지금은 라오스, 미얀마, 네팔, 그리고 몽골에서 다양한 지역개발 및 교육 사업을 실시하며 동남아시아 교화 개척의 반열에 함께했다. 국책사업과 교단사업의 병행이 쉽지 않지만 각국 지역민들에게 은혜를 심을 수 있고, 일원의 법음을 전할 수 있어 그 보람 역시 이루 말할 수 없다.

/사)삼동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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