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도현 교도 / 과천교당
大包無外하고 細入無內하며, 神通智慧와 光明壽量과 大機大用이 無盡無窮하나니 "크기로는 바깥이 없는 데까지 포함하고 가늘기로는 안이 없는 데까지 들어가며, 신통지혜와 광명수량과 대기대용이 다함이 없고 다함이 없나니."

'大包無外하고 細入無內하다'는 것은 앞서 나온 진여묘체, 즉 우리의 성품이 무한히 크기도 하고, 또한 무한히 작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적(同時的)인 것으로써, 때로는 크고 때로는 작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의 성품을 깨쳐서 그 참모습을 알고 보면, 크기로는 온 우주보다도 더 크고, 또한 작기로는 텅 빈 허공과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는 미치지 못합니다.

'크기로는 바깥이 없는 데까지 포함한다'는 것은, 그 크기가 한이 없어서 가히 상대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텅 비어서 참으로 온전히 깨어있으면, 밝고 두렷한 성품의 빛(공적영지)이 온 시방에 가득하고, 마음 자체가 마치 무한한 허공과 같아서, 그야말로 갓(邊)이 없습니다. 이는 물리적 개념으로는 물론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 큰가 하면, 우리의 본래마음은 곧 우주만유의 본원이라, 우리 자성의 혜광이 곧 우주의 공적영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인이 자기 내면의 빛(공적영지)을 경험하면 불생불멸의 참나(眞我)를 의심치 않게 되고, 온 우주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인과의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이와 동시에 진여의 자성은 그 크기가 무한히 작은 것입니다. 실은, 그 본체가 완전히 텅 비어있어서 '작다'고 할 수조차 없습니다. 몽산 스님이 '가늘기로는 안이 없는 데까지 들어간다'고 했는데, 요즘말로 하면 '크기가 0일 정도로' 작다는 뜻입니다.

'세입무내(細入無內)'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면, 우리 성품의 지혜광명은 온 시방을 다 비추면서도 그림자조차 없으니, 그 크기가 이처럼 '안이 없는 데'까지 들어갈 만큼 작다는 것입니다.

수행인의 마음이 참으로 성성적적하여 안팎에 머물지 않는 때가 그렇습니다. 즉, 마음이 텅 비고 고요하여 몸 안에도, 밖에도 머물지 않으면, 이른바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 마음조차도 '있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때는 두렷한 자성의 혜광이 발하여 안팎이 두루 차별 없이 밝으며 그 가장자리가 끝도 없어서, 또한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진여의 자성은 한없이 작은 동시에 또 한없이 큽니다. 이어서 '신통지혜와 광명수량과 대기대용이 다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신통지혜'란, 우리 자성의 혜광이 곧 우주의 공적영지라, 모든 경계마다 거울처럼 늘 밝고 두렷하게 비추기 때문입니다. '광명수량'이란, 이와 같은 공적영지의 밝고 밝은 빛의 수명(壽命)이 무한하다는 것인데, 진공묘유의 우리 성품은 불생불멸이라, 이 영지의 광명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기대용'이란, 위와 같이 밝고 두렷한 자성의 혜광이 일체 경계에서 자유자재로 쓰인다는 말인데, 오직 경계에 주착하지 않아야만 바르게 나투어 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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