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희식 / 농부·〈소농은 혁명이다〉 저자
경남 산청에 가면 '담쟁이 인문학'이라는 모임이 있다. 이 곳에 강의를 갔다가 중학생으로부터 맹랑한 질문을 받게 됐다. 이웃에 소농을 하자고 권하려면 어떤 걸 제시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졸저 〈소농은 혁명이다〉가 출간되고 나서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있어서 참석자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가져봤지만 중학생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와 동갑내기 서정홍 시인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서 책도 읽고 시도 쓰면서 시작된 모임이라 아이들이 중심이라는 얘기를 듣기는 했다. 실제로 가 보니 어른보다 아이들이 많았고 어른들은 아이들 손에 이끌려 나오기 시작했다는 말이 실감났다. 집에서 기른 옥수수를 쪄 오거나 감자를 삶아 와서 50여 명의 참석자들이 넉넉하게 간식을 하는 모습도 이채로웠지만 축가를 부르고 기타연주도 하고 빔 프로젝트 조작도 다 아이들이 하는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인문학은 삶 속에서 영글고 어릴 때부터 생활로 익히는 것임을 웅변하는 풍경이었다.

소농은 누구인가

이웃에 소농을 권하려면 소농의 개념부터 분명히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국제기구인 UN의 가족농 개념을 먼저 살펴보는 것은 소농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UN은 1970년부터 세계가 함께 공감해야 할 주제를 정해 매년 기념해 왔는데 2014년을 '가족농의 해'로 정했다. 2011년에 열린 제66차 총회에서다. 협동조합의 해, 물의 해, 쌀의 해 등 주제를 정할 때마다지정 취지문을 발표하는데 가족농의 해를 정하는 지정 목표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족농과 소규모 농업의 인지도를 높이고 특히 농촌지역에서 지속가능한 개발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 취지문에 따르면 가족농을 말하면서 별도로 '소규모 농업'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가족농은 규모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흔히 '소'와 '대'를 비교하면서 소농을 농사 조금 짓는 소규모 농부를 연상하기 쉬운데 유엔은 이것과 가족농으로 구별해서 이해하고 있다.

취지문의 뒷부분에 가면 보다 분명해진다.

"식량안보와 영양개선, 생활여건 향상, 빈곤·기아문제 완화, 환경과 생물다양성 보호, 지역경제 유지 등에 기여하도록 한다"는 것이 진정한 가족농이라고 한다. 비록 임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가족의 일손만으로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환경과 생물다양성을 보호하는 농사가 아니면 가족농의 개념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대형 기계농이나 첨단 시설농업을 염두에 둔 규정이라 하겠다. 이 개념을 우리나라의 소농에 적용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UN은 왜 소농 또는 가족농을 굳이 '식량안보'나 '빈곤·기아문제 완화'나 '생활여건 향상'에 기여하는 농사라고 했을까. 얼핏 이해가 쉽지 않은 대목이다. 대규모 기계농이나 기업농이 소득이나 식량안보에 더 유리 할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약간의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 소농은 작은 농사가 아닌, 지역의 사회적 경제에 참여하면서 가족의 몸 노동에 크게 의지한다.

생태질서와 종 다양성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기존의 대규모 기업농은 먼저 식량안보 문제에 아주 취약하다는 이야기다. 이 문제는 수입국, 수출국을 구분하지 않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대규모 기업농은 가장 성장이 빠르고 가장 수확률이 좋은 종자를 심을 것이고 여러 화학농자재와 초대형 농기구를 쓸 것이다. 그만큼 위험도가 높다는 것이다. 왜 위험도가 높다는 것일까?

무엇 하나라도 까딱 잘못하면 농사가 다 망가지는 것이다. 외부 환경변수건 내부 요인이건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 짓는 농사라 식량안보에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나라 돈벌이 농사하는 농민들도 거의 투기농업, 카지노농업에 가까운 심리를 갖고 있다. "3~4년 꼴아 박아도 한 번만 대박나면 돼"라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

둘째, 대농 또는 기업농은 영양문제도 안고 있다는 것이고 (농민들의) 생활여건도 열악하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재정규모도 커졌고 씀씀이도 많지만 실속은 그렇지 않다는 게 요즘 우리 농촌의 실정이기도하다.

옛날에는 철저한 소농시절이라 소 한 마리에 괭이와 지게만 있으면 논농사, 밭농사 하면서 예닐곱 명 자식 다 키우고 일 년에 한 번씩 송아지라도 낳으면 학자금 마련해서 대학도 보내고 했지만 지금은 농사를 많이 짓다보니 집집마다 트럭에 승용차, 트랙터는 기본이요 이앙기와 콤바인도 수천만 원짜리를 갖고 있어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다.

그런 농민들은 외형이야 번지르 할지 모르나 일종의 현대판 종, 농업노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물선택도, 파종시기도, 농사 면적도 사실 다 자본이 주도하는 시장 변수에 따른 외부요인으로 결정한다.

'가족농의 해' 취지문은 빈곤과 기아 문제가 초국적 농업기업과 유통, 가공 기업 때문이라고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뒷부분에 언급된 "종의 다양성과 지역경제 유지 등에 기여 한다"는 지적을 보면 소농(가족농)에 대한 중요함과 기대가 묻어난다.

이제 소농이 뭔지 개념이 잡힐 것이다. 절대 농사 규모가 중심이 아닌 것이다. 지역의 사회적 경제에 참여하면서 가족의 몸 노동에 크게 의지하는 농사를 짓고 생태질서와 종 다양성을 해치지 않는 농사가 소농인 것이다. "식량안보와 영양개선, 생활여건 향상, 빈곤·기아문제 완화, 환경과 생물다양성 보호, 지역경제 유지 등에 기여하도록 한다"는 것은 꼭 농부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인스턴트 음식을 안 먹는 것이라든가 육식을 끊고 채식을 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래서 유엔이 정한 가족농의 해 취지문에 합당한 삶을 소규모 농사를 짓는 농부에 한정하지 않고 '소농적 삶'을 사는 사람들로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 소농은 규모가 작은 농사가 아닌, 지역의 사회적 경제에 참여하면서 가족의 몸 노동에 크게 의지하는 농사를 짓고 생태질서와 종 다양성을 해치지 않는 농사다.

소농해서 먹고 살 수 있나

그런데 중학생의 질문에는 현실적인 문제를 짚고 있다. 옆에 사는 이웃 농부에게 소농을 권하려면 소농의 개념이나 소농의 중요성만으로는 부족하다. 먹고 살만 한지를 얘기해야 한다.

사실 소농 아니라 뭐를 해도 요즘 농촌은 먹고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쌓아 놓은 돈이 있지 않고서는 취미로 농사짓는 게 아닌데 먹고 사는 게 걱정 될 수도 있다. 쌀값이 24년 전과 똑같다.

그런데 한 번 차분히 자신에게 물어 볼 필요는 있다. 먹고 살려면 얼마나 벌어야 하는가. 그만큼 벌면 나는 행복할 것인가. 꼭 그렇게 벌고, 쓰고 살아야 하는가. 내가 쓰는 돈들이 다 나를 살리는 지출들인가, 나를 도리어 지치게 하는 지출들인가. 내 돈벌이는 생태윤리적으로 당당한가. 전 세계인들이 그렇게 벌고 그렇게 써도 괜찮은가 등등.

우리 농업은 두 갈래의 다른 길을 가리라 본다. 하나는 대 자본이 침투해 자연과 인간의 손길을 점차 차단해 가면서 완전한 통제가 이뤄지는 공장식 농사다. 주류 농업은 이 길을 걸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연의 운행과 흐름에 농사를 최대한 접목하고 삶 자체를 자연스럽게 만들어가는 자연농사다. 농업이 갖는 독특한 기능이 환경보전적 기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물질중심의 기준을 인간중심, 행복중심으로 바꾸는 농사인 소농은 주류가 되지는 않겠으나 그 맥이 끊기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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