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경원 교무 / 육군사관학교 화랑대교당
육사 발령 이후 2년 6개월이 됐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동안 수천 명의 생도와 장병들에게 위문과 교육을 했고, 4개 기수 생도의 입학과 졸업을 지켜봤으며, 주요 직위자가 있는 본부로부터 명부에 올라 있지 않은 일용직 근무자가 있는 지하까지 부대 곳곳을 다녔다.

불전도구를 도난당하기도 했고, 엄동설한에 문이 잠겨 야외에서 법회를 보기도 했으며,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촛불에 의지하기도 했다. 하급자로부터 삿대질을 당하기도 했고, 이웃종교인에게 괄시를 받기도 했으며, 반대 여론으로 인해 8번의 교당 건축 부지를 옮겼고, 건축 허가를 얻기 위해 관청 관계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정부와 교단의 갈등이 있을 때는 수차례 호출되기까지 했다.

때로는 도서관 사서이자 우편배달부였고, 바리스타이자 주방장이었으며, 새벽녘 빗자루질 하는 청소부이자 늦은 밤 철문을 닫는 공사장 인부였고, 육군 교범과 인성교육 자료를 집필하는 작가였다. 한 명의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문지기였으며, 교법을 전하는 영업사원이자 관광가이드였고, 사소한 공문을 기안하는 행정병이자 교당을 쓸고 닦는 군종병이었으며, 장갑을 낀 작업병이자 소형차부터 트럭까지 운전하는 운전병이었다. 군으로부터는 "안 된다. 기다려라"는 말과 교단으로부터는 "버텨라. 지혜롭게 해결하라"는 말을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성직자와 장교,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인정받지 않은 부임지이지만 그 누구에게도 불평이나 불만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이것이 현실에 있어서 내가 짊어진 육사 원불교 군종장교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종장교 발령 이전, 제도권 밖의 일반교무들의 군교화 환경은 더욱 열악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육사 교화가 있기까지 하심하고 또 하심하고 불공하고 또 불공한 연원교당 교무님과 교도님들의 교화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허름한 강의실에서 0명으로 시작한 법회가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한 아름다운 교당에서 200여 생도와 장병이 북적대는 법회가 됐으니 어찌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하심과 불공을 안 할 수 있겠는가.

원불교 교도로서 잠시 흐트러지고 어긋났다고 해서 모든 일의 순서와 선후본말, 합리와 불합리, 주종을 거스르는 것은 한치 앞도 못 보는 배은자의 삶이지 않은가. 순리자연한 가운데 반드시 되는 이치. 그것이 교단에서 바늘구멍에 낙타를 통과시키는 것보다 어려운 일인 육사에 군종장교를 보낸 뜻이며, 군종장교가 육사에 간 까닭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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