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체적으로 혁신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회에 모범 될 만한 집단인가

자신에게 묻고 차마 대답을 못하는 질문들이 있다.

'우리의 메시지는 낡지 않았는가?' 공부를 하다 루카치나 훗설 등의 철학자들 활동과 소태산 대종사 대각이 비슷한 시기라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었다. 우리 교리에는 당시 시대상황에 따라 봉건의 잔재들을 극복하기 위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성과 인권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미 서양에서는 그러한 근대적 사유를 넘어서는 '포스트 모던철학'이 출발하고 있었다. 백년이 지난 지금 한국사회의 과제는 '봉건질서'의 극복에 있지 않다. 그러나 교단의 대사회적 메시지는 아직도 당시의 시대상황이 반영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교단 외부의 전문가들은 '정신개벽'을 '동도서기론'의 변용으로, 사요는 춘원의 '민족개조론' 등의 실력양성론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과연 우리는 '자본주의 이후' 그리고 '4차 산업혁명'과 같은 지금의 '화두'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대안들은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물론 일원상 진리와 사은·삼학 등의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가르침은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들도 현대인들에게는 접근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가르침이 돼버렸다. 부모가 준 종자를 기념 삼아 매달아 두었던 딸처럼, 우리는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을 묵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물어본다. '과연 우리는 자체적으로 혁신을 할 수 있는가?'

5년 전 정책연구소에서 근무하며 원불교의 혁신정책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면서 '혁신'은 원하나 '변화'는 원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수가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책은 어떤 식으로든 성과가 있었으나, 다수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들은 시행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변화를 위해 희생이 필요한 정책에는 큰 저항이 있었던 것이다.

교화현장에 나온 지금도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기를 두려워하고 변화를 원치 않는다는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교단의 노령화와 출가자 감소 등에 대한 통계나, 정녀제도 등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몹시 불편해하는 출가교도들이 많다. 재가교도 역시 약세교당의 정리에 대해서 이해를 하면서도 '내가 다니는 동안'은 지금처럼 이어지기를 원하고 있다. 많은 교단 구성원들이 혁신을 말하고 있지만 변화에는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

종교인구의 감소라는 시대적 과제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외부의 영향이 아닌 자체적인 지혜와 역량에 의해서 혁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가장 두려운 질문은 '우리는 모범이 될 만한 집단인가?'이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지겹게 들어왔던 말이 '원불교는 국가의 운영을 맡겨도 될 만한 집단'이라는 말이다. 그 말을 하는 교무님들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런 자신감을 가지지 못한다.

앞에서 말한 혁신정책에 대한 연구에서 우리의 정책이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제논의 역설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거짓말'과 비슷하다고 발표했다. 설명을 들어보면 교화에 엄청난 미래를 열어줄 것 같아 많은 자원을 투자한 정책들(군종, 미디어, 교화단)이 대부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하이원빌리지 사태를 겪고 인사에 대한 잡음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기업이나 국가보다 집단의 효율적인 운영을 하고 있을까'라는 의심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훨씬 더 도덕적인 집단이라는 확신도 없다. 재가교도들에게는 실상사 노부부이야기를 예화로 들며 실지불공법으로 고부간 갈등을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를 해결하라 말하면서도, 출가교도들의 갈등을 실지불공법으로 해결하는 실례는 많이 듣지 못했다.

영육쌍전은 이론과 실지가 둘이 아니어야 한다. <대종경> 실시품 2장에서 대종사는 참선을 강요하지 않고 참선의 성과를 통한 교화를 말씀했다. 우리가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는 교리로 세상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 교단은 출발부터 후천시대의 새 종교임을 천명해 왔다. 이제 100년이 지났다.

과연 원불교는 지금도 새로운가?

/득량교당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