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이룬 불사, 스승 뜻따라 일심으로 살았다

"대구교당 교리강습회에서 가서
이경순 종사 만나 출가 서원"

"마을법회 열어 잠자는 교도 교화
기도·좌선하며 교화불사 이뤄
스승님 말씀따라 살아온 세월
열심히만 살았을 뿐…"

옛 사람은 순박했다. 미묘현통(微妙玄通)한 노자의 옛 사람까지야 재주가 없어 못 알아뵌다 하지만, 스승님 말씀따라 그저 살았던 것이 전부라는 욱타원 박영화(78·昱陀圓 朴永華) 원로교무의 주변없는 말솜씨는 참 순박했다. 인터뷰 내내 실수할까 봐 떨리는 목소리에도 그리운 스승님들 이야기가 나올 때면 눈빛이 빛났다.

"당시 24살 됐을 텐데. 나는 세상에서 특별히 할 일은 없고 아주 부모 없는 고아들이나 자녀 없는 노인들을 보살펴 드리며 살아야겠다고 어렴풋이 서원을 세웠죠."

불연, 항타원 종사와의 만남

마을에 잘 아는 사람이 "원불교는 양반집 딸들이 결혼도 안 하고 열심히 선생하더라. 믿을 만한 종교다"고 권해 대구교당 교리강습회에 처음 나가게 됐다. 그때서야 그 양반집 딸들이 항타원 이경순(李敬順) 종사와 달타원 이정화(李正和) 대봉도였음을 알게 됐다.

학생·청년들을 위해 〈자경문(自警文)〉을 가르치던 항타원 종사는 마냥 원불교가 좋고, 배우는 게 좋았던 박영화 선진에게 "신발값이나 할까 했더니 열심히 하는갑다"고 칭찬도 받았다. 전생에 깊은 서원을 세웠는지 항타원 종사와 바로 사제지간이 되고 출가연원이 됐다. 입교하고 원기50년 바로 출가해 서성로교당 이정화 대봉도 밑에서 간사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서성로교당을 짓고 건강이 안 좋았던 이정화 대봉도를 모시느라 입학이 5년이나 늦어졌다. 그는 영산선원에서 수학 후 교화현장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

잊지 못할 교화터

추억이 많은 곳은 옛 팔봉교당(현 삼성교당)에서 근무할 때다.
"당시 마을에서 잔치처럼 마을법회를 열곤 했었지요. 그러면 잠자는 교도도 나오고, 자연스레 입교하는 교도도 생겼어요."

이런 즐거운 추억 뒤에는 잊지못할 고생도 함께했다. 문종이 장사, 벼베기, 텃밭에 심어 기른 고구마순 팔기. 언제나처럼 당연한 고생이었다.

그러다 원기67년 태인교당에 중간발령을 받았다. 교당 터가 1320㎡를 넘었다. 법타원 김이현 종사가 교화부장으로 있을 때 우연히 이곳에 들렸다가 '유아원 지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스승님 말씀이니까 응당 그렇게 유아원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법당도 새로 지었다.

"김인관씨라고 마을 분이 있는데 '원불교는 기도만 하면 다 되는가'하고 묻습디다. '유아원 짓겠다고 열심히 기도 올리니까 유아원이 만들어지더니, 이제는 법당 짓는다고 기도해서 법당도 짓대. 원불교 기도는 그대로 다 되네' 하면서요."

하지만 이게 어디 속 편하게 기도만으로 이뤄진 일인가. 유아원 짓기까지 가슴앓이하다가 삼성교당 교도가 잡석 싣고 와 축담 쌓아주고 간 게 그리도 고마웠다. 또 파출소에 근무하는 청년회원이 흙 퍼서 경운기에 실어다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태인교당에서 불사를 마치고 나니, 원기74년 재무부로 발령받아 식당 일을 했다. 지금 총부 식당채를 지을 때라 현 박물관 앞에 텐트를 치고 살아야 했다. 거기서 소태산탄생100주년기념대회도 치러내야 했다.

왜관, 천도재의 인연

이후 원기77년 대마교당에 갔을 때 예산 이철행 종사를 모시며, 전임인 서덕조 교무와 40일 같이 살았다. 거기서도 대마교당을 새로 지을 때였다. 그때 아침마다 좌선 나온 교도들과 참 재밌게 공부했다. 좌선하고 교전봉독하고 요가도 하면서 모두들 좋아라 했다. 그러다가 허리를 다쳐 수술하고 휴무했다. 하지만 1년도 안돼 다시 발령받아 나갔다. 그것도 왜관 개척이었다.

"당시 친오빠가 왜관에 살고 있어서 친근한 곳이었어요. 가서 보니 왜관이 큰 데 교당이 들어서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셋방만 얻으면 되는 줄 알고 쉽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당시 왜관은 이경순 종사가 교구장으로 있었을 때도, 정타원 이정은 종사가 교구장을 지낼 때에도 교당을 내려했지만 실패한 곳이었다.

"처음엔 교구에서도 돈이 없어 어려워했지요. 그러다가 당시 좌산종법사께 누군가 '왜관교화를 지원하는 사람이 있네요' 보고하니 '그 사람 한다고 하면 하는 사람이다. 합해줘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제가 대마교당에 사는 것을 보면서 짐작하셨나봐요."

왜관에 집을 구하려고 애를 썼지만 마땅한 집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76㎡쯤 되는 가게 하나가 나왔다. 집주인이 살려고 야무지게 지은 집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경매로 내놓은 것이다. 경매가로 7천만 원에 낙찰받았다.

"교당을 내고 나니 상산 박장식 종사님이 대구오셨다가 들리셨어요. 이곳 터를 보시더니 '여기는 6.25 전쟁 때 많은 사람이 희생된 곳이니 천도재를 지냈으면 좋겠다' 하셨어요"

그 말씀을 받들어 6월마다 7·7 49재를 꼭 모셨다. 한번은 대대적으로 현수막도 걸고, 때로는 왜관지구 전적기념관에 가서 김현 교무를 법사로 모시고 대대적 천도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아무튼 기도를 열심히 했어요. 법당에서도 하고, 낙동강 옆에서 천도법문도 열심히 읽고. 잘하지는 못해도 정성으로 하는 것이라고 해서 오로지 일심으로 천도재를 모셨지요."

스승님 은혜

그렇게 왜관선교소에서 6년을 조금 못 채우고 원로원에 급히 사람이 필요해 중간발령을 받았다. 그때 교단 어른을 많이 모셨다. 임기동안에도 모시고, 퇴임해서도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며 연장근무도 했다.

"박장식 종사님은 주로 의자에 많이 앉아 계셨어요. '바닥에 앉으시라'고 말씀드리면 '의자가 편하다'고 하셔서 의자가 정말 편한 줄 알았지요."

박장식 종사가 감기 들었을 때 '누우세요'라고 간청드리니 '습관될까 봐 안 눕는다'는 말씀에 깜짝 놀랐다. 남모르게 무섭게 적공하고 있는 부처님이었다.

김이현 종사를 모실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법타원 종사가 신발 벗는데 힘들어 해서 도와드리려 하니 '그러면 대종사님이 안 좋아하신다'고 한 말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몸이 불편하고 병이 들어도 대종사가 말씀한 자력생활을 꼭 지키려는 스승님들의 자세는 감동 이상이었다.

"저는 특별히 잘 산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스승님들 모시고, 열심히 산 것이 전부일 뿐이죠."
평생 특별히 잘 한 일이라고 생각난 게 없었다. 공부는 일이 생길 때마다 기도하고, 가는 교당마다 교도들과 함께한 좌선이 전부였다. 그런 공부 속에 교당이 생기고, 교도들은 주인으로 자리잡아 갔다.

그는 원기76년 소태산탄생100주년기념사업에서 '법강항마위' 법위승급 기념으로 받은 〈원불교교전〉을 큰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 모시고 존경하던 스승님들께 한 생 허투루 살지 않았다는 마음에서다.

그 소중한 보물. 〈원불교교전〉에서 그가 가장 마음에 담았던 법문을 읽어준다.

"재가출가와 유무식을 막론하고 당일의 유무념 처리와 학습 상황과 계문에 범과 유무를 반성하기 위하여…."

소태산의 너른 품에 당신도 안길 수 있어서 감사했다는 듯.

▲ 법강항마위 승급식 때 기념으로 받은 〈원불교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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