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고을 성주, 성자의 고향이 되다

▲ 정산종사가 천하창생을 제도하는 사업을 이루고자 상당기간 기도정성을 올린 박실 구도터 거북바위. 자신의 포부를 담은 '장부회국론'이라는 글을 짓기도 했다.
최근 사드배치문제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성주는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의 중심지였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며 가야문화, 불교문화, 그리고 유학의 발달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의 고장이다.

그 옛날 성주는 성산가야의 옛 터전이며 가야문화 이후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었던 곳이다. 대부분 가야산 하면 해인사를 떠올려 합천만 생각하기 쉬우나 가야산은 사실 성주의 진산이며, 가야산 동쪽 기슭에 폐사 터로 남아있는 법주사 터는 신라시대 때 성주 불교문화의 저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가하면 고려시대의 동방사 칠층석탑은 성주읍의 지킴이 구실을 하고 있다.

또한 성주는 조선중기 사림들이 정착해 많은 인재를 배출한 유림의 고장이기도 하다. 조선 왕실의 태실을 관내에 안치한 까닭에 행정구역이 군에서 목으로 승격돼, 정 3품관인 목사가 머물렀고, 서진산 자락에 안긴 세종대왕 왕자 태실은 조선시대 태실 운영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이러한 문화의 고장 성주는 구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원불교와의 인연이 깊어졌다. 성주와의 인연은 소태산 대종사의 법통을 계승해 교단 발전의 터전을 확립했던 2대 종법사 정산 송규 종사로부터 비롯된다. 현재는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는 정산·주산 송도성(主山 宋道性) 종사의 탄생가와 성장지, 정산종사 구도지로 각광을 받으며 원불교 성지로 부각됐다.

정산종사와 주산종사 탄생가

초전면 소성1길 에 위치한 성보 제 14호 탄생가는 부친 송벽조 선진이 고산리에서 생활하다가 정산종사를 낳기 전 이곳으로 이사했다. 정산종사는 1900년 8월28일 부친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 대희사와 모친 준타원 이운외(準陀圓 李雲外) 대희사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탄생했다.

탄생가 사랑채는 당시 동네 아이들의 서당이기도 했다. 정산종사는 이곳에서 조부로 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해 8세부터는 본격적인 한학공부를 시작했고, 9세경 <통감(通鑑)>을 배웠는데 스스로 문득 "대장부로 이 세상에 태어나 한 나라를 바로 세우는 큰 인물이 되지 못한다면 어찌 후세에 대장부라 이름 할 것인가. 혼란한 이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기르고 경륜을 쌓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1907년 11월19일(음)에 친동생인 주산 송도성 종사가 태어났다. 정산종사는 동생이 태어나자 기뻐서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며 마을을 향해 큰소리로 "동네 사람들! 우리 집에 장수가 났어요. 어서 와서 봐요. 우리 집에 큰 장군이 났단 말이요"라고 외쳤다고 한다.

원기78년 인천교당 이성규·류순명 부부 교도의 정재 희사로 정산·주산종사 탄생가 대지 663㎡ 토담조 슬레이트 주택을 매입해, 원기79년 10월20일에 정산종사탄생1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탄생가 본채를 복원해 준공식을 가졌다. 정산종사가 탄생한 방에는 정산종사와 주산종사의 진영을 모셨다. 탄생가의 돌담과 우물은 옛 모습을 찾았고, 정문 입구에 삼동윤리비는 탄생가 복원 때 세웠다.

소야 성장터

정산종사가 10세경에 있었던 일로 전해오는 일화다. 목화를 따러가던 정산종사 모친 이운외는 따라오던 아들의 기척이 없어 뒤돌아보니 저만치서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봤다. 그는 아들이 돌아오자 그 노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느냐고 물었다. 정산종사는 "처음 뵙는 노인이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이었으나 범상한 분이 아닌 것 같아 저런 분 중에 이인군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나 도인이 아닌가 싶어 물어보았으나 별 사람 아니기에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정산종사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구도열정에 답답해했던 마음을 후일 회고로 전했다. "10세를 전후해서 있었던 일로 기억된다. 그때는 정말 모든 것이 궁금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천하의 큰일을 해야 할 것인데 뜻과 같이 되지 않으니, 답답함은 가중됐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 모든 것을 잊는 것은 물론, 답답한 것도 풀린다는 말을 듣고, 답답함을 풀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집에서 만든 동동주를 다섯 사발 정도나 마셨는데 근심은 더하고, 머리는 지근거리며 몸은 중심을 잡기가 어렵기만 하더라. 술 먹으면 모든 것 잊고 답답함도 풀린다는 것은 거짓이더라."

또한 한나라를 바로 세우는 큰 인물이 되고자 했던 생각이 11세경 <사서(四書)>를 공부하면서 "대장부가 어찌 한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에서 만족할 수 있으랴. 천하창생을 널리 구제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건설하리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정산종사는 10세를 전후해서 제생의세 성불제중의 큰 서원이 확립된다. 정산종사가 12세 경에 한시 한 수를 지었다.

'지수만물무피차(地輸萬物無彼此) 천강조민유비존(天降兆民有卑尊) 유연즉시일시남(劉淵卽是一時男) 문무겸전기불난(文武兼全豈不難) 지상에 실린 만물 너와 내가 없었건만 하늘이 내린 백성 높낮음이 있어졌네. 유연은 한 시대를 주름 잡던 사나이나 문무를 겸전하기가 어찌 어렵지 아니하랴.'
▲ 초전면 소성1길에 위치한 성보 제 14호, 정산종사와 주산종사 탄생가의 60년대 모습.
박실 구도터

정산종사가 13세 되던 봄에 중타원 여청운과 결혼을 하게 되자 부친 구산 송벽조는 새로 집을 지어 소야마을에서 박실(朴谷)마을로 이사했다. 박실마을 집 뒤뜰에 크지 않은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정산종사는 "송도군(정산종사의 본명)이 후일에 천하 창생을 제도하는 사업을 이뤄서 그 빛난 이름이 영원한 세상에 유전되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천지신명께 간절히 빌기를 계속했다.

거북바위 기도 때 모습을 모친 준타원 이운외는 회고담에서 "옆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웅덩이를 퍼서 맑힌 후 정갈한 그릇에 떠 거북바위 앞에 진설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경건했고, 범상함을 넘어서 천상에서 내려온 동자가 수도하는 모습 같았다"고 말했다.

밤으로는 거북바위에서 기도를 올리고 낮으로는 <사략(史略)>이라는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의사와 포부를 나타내는 '장부회국론(丈夫恢局論)'이라는 긴 글을 짓기도 했다.

그 뜻은 '대장부가 이 세상에 출세하여 마땅히 공중사에 헌신 봉공하여 그 은혜가 천하 만민에게 골고루 미쳐가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갓 구구한 가정생활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장부회국론'은 상주에 살던 이종 사촌형인 김석주가 이 글을 보고 감탄하여 되돌려 주기로 하고 빌러갔으나 되돌려 주지 않아 전해오지 못하고 있다.

정산종사는 거북바위에서 기도를 상당히 계속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자 집안에서 올리면 효과가 있을까 생각되어 방안에 '천문도(天文圖)'를 그려놓고 천문도를 향하여 하늘 기운이 응하기를 빌고, '지도서(地圖書)'를 놓고 땅 기운이 응하기를 빌었다. 또한 고대 성현군자와 영웅달사들의 명패를 봉안하고 천하를 구제할 수 있는 큰 힘을 갖추게 해 달라고 축원기도도 올렸다.

'정산종사탄생100주년기념사업회'에서 성주성지 기도실 '원불당'을 지었다. 정산종사 박실 옛 집터 본채자리에 세워진 '소성구도지비'를 거북바위 방향으로 약간 이건(移建)하고, 기념비가 서있던 자리에 한옥 56㎡ 3칸 맞배집으로 원기84년에 기공해 그해 8월에 원불당 상량식을 했다.

상량문은 정산종사가 친히 지은 '영주(靈呪)' 가운데 앞부분인 '천지영기아심정 만사여의아심통(天地靈氣我心定 萬事如意我心通)'을 범산 이공전 종사가 붓글씨로 썼다. 원기85년 6월20일 성주성지 기념법당인 대각전 봉불식과 함께 원불당도 봉불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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