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도광 교무/공군사관학교, 성무교당
교리여행을 출발한 때가 정말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회라니 믿겨지지 않는다. 더 믿겨지지 않는 것은 내가 인생여행을 시작한 지 올해 40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태어났을 때가 엊그제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4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 왔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나이가 사십이 넘으면 죽어 가는 보따리를 챙기라는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이 있다. 그래서 지금껏 나보다 먼저 40세가 되었던 선배들에게 장난스레 "이제 죽음 보따리를 챙기셔야겠다"는 말을 쉽게 하곤 했는데 막상 내가 40살이 되어보니 그 말이 결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범상한 사람들은 현세(現世)에 사는 것만 큰 일로 알지마는, 지각이 열린 사람들은 죽는 일도 크게 아나니, 그는 다름이 아니라 잘 죽는 사람이라야 잘 나서 잘 살 수 있으며, 잘 나서 잘 사는 사람이라야 잘 죽을 수 있다는 내역과, 생은 사의 근본이요 사는 생의 근본이라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조만(早晩)이 따로 없지마는 나이가 사십이 넘으면 죽어 가는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하여야 죽어 갈 때에 바쁜 걸음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다.

예전에는 이 법문이 40세가 되면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으로 여겨져서 "요즘 생명연장 100세 시대인데 40세의 나이에 죽음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닐까" 하며 시대흐름에 맞지 않는 법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큰 깨달음을 얻은 소태산 대종사가 100년 앞도 못보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라 생각되어 곰곰이 연마를 해보았다. 그 결과 이 법문말씀은 '죽음'보다는 '보따리'에 더 중점을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누구나 이 보따리는 하나씩 가지게 된다. 그리고 담아 둘 것이 없다고 갖지 않을 수 없고, 무겁다고 버릴 수도 없다. 이생에 살면서 모든 선업과 악업은 여기에 담기고 쓰이며, 내생에 그대로 풀어서 쓰이고 또 담아진다. 그렇다고 하나가 더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진리의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이치인 것 같다. 그러면 왜 이 보따리를 40세가 넘어가면 챙기기 시작해야 하는가.

공자는 40세가 되면 바깥 사물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에서 불혹(不惑)이라 했다. 40세 전까지는 이것을 보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것을 보면 저것이 옳은 것 같아 판단을 세울 수 없었는데, 나이가 마흔 살이 넘게 되면 그런 판단을 흔들림 없이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불혹의 기운을 빌려 40년을 살면서 보통의 희로애락과 흥망성쇠를 경험으로 선연도 짓고, 악연도 짓게 되는데 이러한 것들을 보따리에 그냥 담는 것이 아니라 선연은 더 지중하게 여기고, 악연은 지혜롭게 잘 풀어 선연으로 다시 챙겨서 담아야 하는 것이다.

불혹의 나이가 넘어서도 자기의 길을 찾지 못하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우왕좌왕하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죽어갈 때도 우왕좌왕할 것이다. 그러니 이 보따리를 잘 챙겨서 생사의 근본을 잘 알아가지고 죽어 갈 때 바쁜 걸음하지 말고 평안히 갔다가 평안히 다시 오는 복전을 쌓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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