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배움과 서원의 끈 놓지 않으리"

한글 배우고 싶은 열정, 원불교 만남과 입교로 이어져

"양도신 교무 열반했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배움이 불연으로 이어지다

집에 들면 노복 같고, 들에 나면 농부 같고, 산에 가면 목동 같이 진자리 마른자리 구별없이 살아온 인생. 모질었던 세간 풍파에서 이렇게나마 사람 구실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소태산 대종사와 원불교가 한없이 감사하기만 했던 맥타원 이선균(92·脈陀圓 李善均) 원로덕무.

김제군 용신리에서 태어난 그는 공부에 욕심이 있었지만 '여자가 학교 들어가면 베려서 못쓴다'며 아버지는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자라면서도 한글 배우고 싶은 열정은 식지 않았는데, 이것이 불연(佛緣)으로 이어질지 어찌 알았겠는가.

당시 용신교당은 원기27년 재부임한 영산 박대완 교무가 주재하며 10년 이상 농촌 개선 활동에 앞장서고 있을 때였다. 예횟날이면 사방 십리 밖에서 도시락 싸들고 모인 교도가 300여 명에 이르렀다. 농촌계몽운동과 농업개량 등을 가르치는 농촌교화는 그야말로 최신식 교화였다. 이 같은 분위기에 이선균 원로도 어떻게 한 글자라도 배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교당에 나간 게 박대완 교무 연원으로 입교까지 하게 된다.

말 못할 가정사연도 많았다. 그래서 원불교는 새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원기41년 보좌교무로 이백철 교무가 발령받자 평균 40여명 출석하는 야학을 낮반과 밤반으로 나눠 전문적으로 이끌어갔다.

"이렇게 공부하고 살았으면 원이 없겠다고 생각했지. 출가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도망치듯 원불교로 왔어."

첫 출가 근무지, 간난한 영산시절

원기43년 출가하자마자 영산선원으로 발령받아 공양원으로 봉직했다. 당시 영산선원은 정관평 재방언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래서 원기42년 휴원 상태였고, 남녀 할 것 없이 방언공사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였다.

"그때 식당채를 지으려고 뼈대만 세웠지. 식당 애들 데리고 인부들하고 선생들하고 식사 챙겨줬제. 공양만 한 게 아니고 밭에 깨도 심고 기름도 짜고 많이 힘들었어."

밭만 갈려고 하면 돌이 그렇게 나왔다. 땔감도 없어서 나무도 직접 베야할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밥이 넉넉지 못해 모두가 실컷 먹지도 못하고 일을 해야 했던 일이 가슴 아팠다.

영산에서 4년 동안 인부들과 동고동락하다가 원기47년 부안교당 감원으로 발령받았다.
"부안교당에 종이 하나 매달려 있었지. 아침에 33번, 저녁에 28번 하고 내가 매일 쳤어."

그런데 교당에서 종각까지 가려면 방죽이 하나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여기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둑해질 때마다 종치러 가는 게 무서워 미리 가서 '불쌍한 분들 잘 천도해 주세요'하고 심고도 올리곤 했다.

원기49년 말 영산교당으로 발령받았다. 영산선원의 간난했던 세월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꿈같은 출가를 하고서 처음 살았던 고향 같은 곳이 바로 영산이었기에 그에게 영산교당은 친정집을 찾아온 것만 같았다.

"고생은 똑같이 했어도 좋았지. 영산교당도 밭이 참 넓었어. 괭이질하면 돌만 나오는 게 똑같았거든. 그래도 고향이었제."

늘 생각나는 사람, 양도신 교무

이후 원기55년 함양교당에서 감원으로 살다가 이듬해 종로교당으로 발령받았다. 이때 모셨던 교무가 훈타원 양도신(薰陀圓 梁道信·1918~2005)교무 였다.

"참 정직하고 오롯이 온통 바쳐서 산 분이제. 나한테도 참 잘해주셨어. 그 분만 생각하면 한없이 고마워."

그가 부임하던 원기56년에 종로교당은 큰 경사를 맞기도 했다. 그해 3월31일 중앙총부에서 시행한 교화3대목표 추진운동 종합시상식에서 종로교당이 광주교당과 함께 전국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종합시상식까지 범타원 김지현 교무가 있다가 4월 필동교당으로 전임되고 바로 양도신 교무와 백수정 교무, 이선종 부교무가 부임했다.

교도도 많고 식구도 많은 곳에서 감원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교리강좌와 사상강연회는 물론 교당 신축, 연원교당 설립으로 이곳에서도 바쁘기 매한가지였다. 그 가운데서도 양도신 교무의 식사 챙겨드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면서 보람있는 일이기도 했다.

"여기서도 고생 많이 했제. 그리고 훈타원님 식사도 내가 챙겨드렸어. 훈타원님은 보리를 많이 섞어 드려야 돼. 그냥 쌀밥은 잘 안 드셨어. 반찬이랑은 교도들이 원체 잘해서 가져다 주니까 그것으로 차려드리고."

그에게 지금까지 모신 교무들이 다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늘 생각나는 사람은 양도신 교무라고 손꼽는다.

"다 좋은 양반들이었어. 근데 훈타원님이 가장 가슴에 남어. 종로에 있을 때 훈타원님이 참 잘해주셨어. 지금 말이라도 해야 그 분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지. 훈타원님 열반하실 때 겁나게 울었거든. 훈타원님은 '어떻게든지 잘 살고, 우리 공부 잘하라'고 항상 말씀하셨어. 그런 소리 받들고 살았어."

종로교당 3년을 살고나니 우이동 수도원으로 이동해야 했다. 당시 수도원장도 양도신 교무가 겸직했다.
"그래도 그 분하고 헤어진다고 생각드니까 그렇게 서운할 수 없대."

종로교당과 달리 우이동 수도원은 밥, 반찬이 귀했다. 당시 수도원에서 운영했던 골프 연습장이 있었는데 거기 직원들까지 밥을 다 해먹여야 했다.

"그때만 해도 밥이 귀했지. 백 의사라고 한번씩 오는데 그 분 반찬 대기도 쉽지 않았어."

교도들이 반찬을 만들어 줬던 종로교당과는 달리 여기서는 일일이 다 만들어내야 했다. 영산시절처럼 땅을 갈고 고추를 길렀다. 된장도 손수 담갔다. 영산에서나 여기 수도원에서나 여전히 밥이 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 배움의 열정은 90세가 넘어도 매일 이어지고 있다. 한자 한글자씩을 그동안 연습한 견습지가 한 보따리다.

교화에 정성들였던 그 시절

원기62년 부천교당에서 김원만 교무를 만나 함께 살다가 원기71년 김원만 교무와 함께 대야교당으로 이동해 이듬해 퇴임했다.

"처음 대야교당 갔을 때 교도가 5명인가 안됐어. 나는 밥 먹고나면 연등 만들어서 팔았어. 교도들도 좋아하고, 연등 달러 온 사람들도 많이 늘었제."

혼자 대부분 일을 해결해야 했던 수도원 생활과 달리 몇 사람이라도 모였던 교도들이 좋았다. 그래서 뭣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법회가 끝나면 금방 교당이 비어버린 것이 싫어 하다못해 감자나 고구마라도 쪄서 나눠먹으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나눴다. 사람사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김 교무와 함께 나올 때 교도숫자가 50여 명이나 불어나 있었다.

"대야교당 나올 때 집까지 짓고 나왔어. 뭐라도 먹어야 이야기를 쪼까라도 하제. 안그러면 금방 다 집에 가버려서 교당이 휑해. 그래서 뭣이라도 해서 먹일라고 했제."

퇴임해 수도원 들어와서도 수의를 만들어 팔았다. 베 떠다가 바느질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도 옛날 일이었다.

"대종사님 법 만나서 호강스럽게 잘 사는거 같어. 방도 따뜻하게 해주지. 우리 오희선 이사장님 참 좋지. 직원들 친절하지. 심고 모실 때마다 기도해. 대종사님 법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앞으로도 세세생생 만나게 해달라고 말이여."

그 서원 그 자취로

매일 3시30분에 일어나 일원상서원문 외우고 심고모시는 생활도 벌써 한참이다.
"그 전에는 법 좋은 줄 모르고 살았는데 지금은 너무나 법 좋은 줄 알겠어."

낮에는 어렸을 때 그렇게나 공부하고 싶었던 글쓰기와 독서에 여념이 없다.
"학교 다닐 때 문학이란 거 전혀 모르고 살았는디. 우리 이사장님이 낸 책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92세. 얼마남지 않은 생이니, 지금까지 두터운 업장 털어버리고 마지막까지 배움과 서원의 끈을 놓지 않으리라. 그 서원 그 자취로.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