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상 작가/북일교당
세상에는 숱한 경전들이 있다. 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였고, 불경은 고대 인도어인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쓰여 있다. 반야심경의 예만 들더라도 산스크리트어로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널리 알려진 반야심경은 현장이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 외에도 구마라습이 번역한 반야심경 등 무려 여섯 종류의 반야심경이 존재하고 있다.

인도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돌아온 산스크리트어 전문가인 선운사의 재현스님에 의하면, '색즉시공'만 하더라도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색즉시'자성'공(色卽是'自性'空)"이라는 것이다. 해석하자면, 색이 곧 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색이라는 자성이 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질의 현상이나 실체가 곧장 텅 빈 무엇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현상을 구성하고 있는 색의 자성이 공하게 된다는 것이 산스크리트어의 원문이라고 말했다. '색즉시공'과 '색즉시자성공'은 결코 같은 뜻이 아니다. 번역하고 해석하는 사람과 입장에 따라 경전의 의미는 얼마든지 확장되고 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원전(原典) 자체를 훼손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현장은 구마라습에 비해 의역을 아주 많이 했다. 그 의역된 문장이 원전은 아니다.

대부분의 불경은 '이와 같이 들었다'로 시작한다. 또한 성경의 대부분도 요한이나 마태 등이 예수의 행적을 나름대로 기록하여 편집한 것들이다. 예수나 하나님이 직접 쓰거나 말하지 않았다. 제자들이나 선지자들 그리고 기록자들이 '이와 같이 보고 들었다'라고 하며 썼고 편집했고 복음이라고 명명하였다. 불경에 <석가모니경>이 없는 것은 석가모니가 직접 경전을 서술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성경에 <예수복음>이나 <예수경>이 없는 것 또한 예수가 직접 경전은 편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종경>은 고등종교의 우리말 최초 경전이다. 우리말 경전이기 때문에 원전의 훼손도 없다. <대종경>은 소태산 대종사가 살아생전에 직접 말하고 행동한 것들을 편찬한 경전이다. 더구나 아주 쉬운 표현으로, 누구나 알기 쉽게 써놓았다. <금강경>, <능엄경> 등은 얼마나 어려운가. 원효의 여러 저작 또한 번역된 우리말로 읽어도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에 비하면 <대종경>은 초등학교 국어책처럼 읽힌다.

소태산은 <대종경>을 편찬할 때 '장엄'을 피하라고 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쓰잘 데 없는 수사나 수식을 피하고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경전을 편찬하라는 말이었다. 여기에 <대종경>을 쉽게 쓴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물론 〈대종경〉은 1940년대 국어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현대적 국어의 기틀로 보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대종경>을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규정하면서 반드시 문학사적인 평가를 해야 한다고도 했다.

만약 중국어나 영어 혹은 산스크리트어나 히브리어로 쓰인 것만을 경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전히 지식 식민지의 백성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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