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원전 사고…NGO활동가로 원전 가동 중지 외쳐와
오염없는 먹거리, '내 손으로 지급하고 싶다'는 열망과 귀농
발품 팔아 설치한 태양광 집열판…문명의 소중함 일깨워 줘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던 2011년, 그날이 우리에게 삶의 전환점이었다.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하염없이 쓰나미가 몰려들고 일본의 원전이 가동을 멈추던 날, 손 쓸 새 없이 바다로 흘러드는 방사능 유출에 경악하며, 바로 옆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에 모두가 가슴 졸이며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그 사건.

그 사건이 있던 당시 나는 환경단체 NGO 활동가였고, 지구를 병들게 하는 원전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충격은 더 크게 다가왔다. 매일 저녁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밝히고 책임있는 해결을 촉구하며 원전 가동 중지를 외쳤다. 피해를 입은 모든 생명들을 위해 천 마리의 종이학을 접고, 평화의 춤을 추고 서로를 위로했다.

전부터 이용하긴 했지만 오로지 생협을 통해서만 장을 보고 혹시나 일본산을 먹게 되지 않을까, 수산물은 가급적 먹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 속에는 늘 갈증이 멈추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것일까?

그런 열망에 들뜬 가슴을 누르지 못한 채 무작정 귀농을 선택했다. 당시에는 '그저 내 손으로 먹을거리를 자급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 하나만 품고 지인이 살고 있는 담양으로 터를 잡았다. 담양 작은 시골 마을에서 결혼식도 올리고 마을일도 거들며 살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도시에서 시골로 몸만 옮겨온 것만 같았다.

우리는 담양에서 천연 밀랍초를 만드는 공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공방에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 분은 장흥의 동백숲 입구에 작은 흙집을 짓고 전기와 수도, 가스, 세상의 모든 석유문명을 거부한 채 살아가고 있었고 마침 밤에 쓸 초가 필요해 공방과의 인연을 맺었다고 했다.
▲ 숲속 생활이 꿀처럼 달콤한 것은 아니다. 냇가에서 설거지하고 아궁이로 불을 때며 좌충우돌 삶을 일궈 나가지만 동백숲 생활의 행복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가스렌지 대신 나무 석쇠로 밥짓기

그 만남이 인연이 되어 우린 결혼식이 끝난 후 동백숲 작은집으로 신혼여행을 가게 되었다. 매일 아궁이에서 불 때는 냄새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작은 샘터에서 물을 깃고, 냇가에서 설거지를 했다. 그때가 마침 5월 말이라 주변에 심겨진 야생 녹찻잎을 따 덕석에 비벼 차도 만들어 보고 소나무 아래 누워 별도 보고 바람도 맞으며 일주일을 보냈다. 화려한 휴양지도, 편리한 시설도 없었지만 그 소박하고도 맑은 일주일의경험이 내 안에, 나와 남편의 가슴속에 다시금 새로운 불꽃을 일으켰다.

다시 담양으로 돌아가는 차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며칠 밤 사이 마치 다른 세상으로 느껴졌다. 한바탕 꿈을 꾼 건 아닐까. 동백숲에서 느꼈던 그 충만함을 다시 느낄 순 없을까.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그 간절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고, 남편 하얼과 나는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해보자고 다짐하며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멀쩡한 가스레인지를 두고 마당 한켠에 기왓장을 구해 와 쌓고 그 위에 석쇠를 얹어 나무로 불을 때 밥을 짓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던 곳에서 나무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시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은 온통 들판과 논밭 뿐, 숲이나 산은 자전거로 한 시간이나 가야 찾을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린 쉽게 포기하지 않고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산에가 샘터를 찾고, 유리병과 들통에 물을 길러오고, 땔깜을 주워와 불을 피웠다. 마을 사람들도 젊은 부부가 피워대는 야단법석에 때론 혀를 차시기도 하고 때론 조언해 주시면서 재미있게 지켜봐 주셨다.

그렇게 1년여를 보내던 중 동백숲에 살던 분이 페루로 떠나게 되면서 우리가 그 작은 집에 들어가 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오갔다. 전부터 열망하던 삶이었지만, 사실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지금 이곳에서는, 그래도 힘이 들거나 꾀가 나는 날이면 가스도 쓰고 뜨거운 물도 쓸 수 있지만, 동백숲은 도망갈 여지도 없을 텐데, 정말 우리가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염려되고 걱정되는 마음 투성이었지만 우린 또 한 번 과감히 가지고 있던 모든 짐을 처분하고 마티즈 한 대에 상자 몇 개를 싣고 2012년 겨울의 초입, 그렇게 동백숲에 들어왔다.
▲ 동백숲 작은집으로 가는 길. 가족은 이 길을 걸어 산책도 가고 친구네도 가고 장에도 간다.
달빛아래 춤을, 샘터에 입맞춤을!

숲에서 생활한 지 이제 5년차. 그동안 이 숲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두 사람이 살던 숲은 재작년 첫째 딸 비파가 태어나고 지금은 또 3월에 태어날 둘째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다. 아이가 생기면서 아궁이에 쪼그리고 앉아 요리하기가 힘들어지자 남편은 기존에 있던 집에 작은 거실을 덧대어 짓고 그 안에 입식 화덕을 만들어주었다.

물론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자동차도 들어올 수 없고 전기도 없는 곳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의 연속이었지만 여기저기서 많은 친구들이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들까지)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함께 집짓기를 도와주었다. 나무를 어깨에 이고 지고 숲길을 내려와야 했고 수도도 없어 냇가에서 물을 길러 릴레이로 전달해 흙을 반죽했다. 씻는 것도 자는 것도 모두 불편했지만 공사 기간 내내 숲에는 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세상의 시계에 맞춰 살던 삶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시간으로 이곳을 채워간다. 해가 뜨고 짐에 따라 생활양식도 변한다. 요즘처럼 해가 짧은 겨울에는 아침 10시가 되어야 해가 뜨고 4시면 어둑어둑해 진다. 그러면 겨울 곰처럼 따끈한 방에 앉아 고구마도 구워먹고 책도 실컷 읽고 비파와 뒹굴거리며 겨울을 보낸다.

즐거운 불편, 자급보단 자족을!

물론 숲 속 생활이 꿀처럼 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버튼 하나면 난방부터 취사, 청소와 빨래까지 가능한 현대의 최첨단 생활을 30여년간 몸으로 누리고 살았던 터라 매일 아침 물을 길어와 항아리에 채워야 하는 일이 때론 버겁게 느껴진다. 겨울에 게으름을 피우면 나무가 모자라 추위에 바들바들 떨어야 할 때도 있다.

지난 여름엔 폭염으로 냇물이 말라버려 빨래는커녕 씻는 것조차 힘들어 여기저기 시댁이며 친구 집을 전전하며 한 달을 살아야 했다. 가뭄이 끝나고 나서는 장마가 말썽이었다. 태양열로 충전해 쓰는 랜턴이 켜지지 않아 촛불에 의지해 살아야 하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숲에 사는 벌레도 극성이어서 여름이면 온몸에 진드기며 벼룩에 뜯긴 자국이 수두룩하다. 그럴 때면 아, 이 숲에서 계속 살아도 되는 걸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사실 이 곳에 산 이후로 두 번 정도 숲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공간이 중요한 게 아니고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힘을 내 즐겁게 살아갈 방법을 찾곤 한다.

냇물이 말라버린 지난 여름, 하얼은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계곡 상류에 올라 마르지 않은 샘을 발견해 그곳에서부터 집까지 호스를 연결해서 우리만의 수도를 완성했다. 한 달 넘게 공부하고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750w 스스로 태양광 집열판을 설치했다. 햇볕이 좋을 때 세탁기를 돌릴 수 있고 핸드폰을 충전할 수 있다. 그 덕분에 한 겨울에도 얼음을 깨 가며 냇가에서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고, 비파도 다시 천기저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핸드폰 충전을 하거나 글을 쓰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밖에 나가 외부전기를 쓰지 않아도 된다. 태양광을 설치하기 까지 많은 고민이 뒤따랐지만 우리는 그동안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태양광을 설치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 삶을 더 즐겁고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여전히 좌충우돌하며 살고 있지만 스스로의 삶을 일궈 나간다는 것, 모두가 가는 방향이 아닌 다른 삶을 꿈꿔본 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충분히 행복하다.
▲ 페달 씨/장흥 동백숲 귀농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