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자본주의 문제와 그 처방전은 차고도 넘친다. 그 핵심에 종교가 있다는 점은 유명한 두 사람의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첫 번째는 수정자본주의자인 케인즈다.

그는 "만일 경제적 진보에 도덕적 목적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비록 하루라 할지라도 물질적 이익을 위해 도덕적 이익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사업과 종교를 혼이 다른 각각의 방에 넣어두어서는 안 된다"라며 종교와 경제의 가치가 한 지구 안에서 공존해야 함을 강조한다.

두 번째는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한국의 미사에서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 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라"고 하는가 하면,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라"며 물질주의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통렬한 비판과 투쟁정신을 고취시켰다.

소태산 또한 원불교를 창건한 이유가 직접적으로 과학과 이에 기반한 자본주의에 있음을 알리고 있다. '현하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물질의 노예가 된 인간은 고해에 표류하는 삶이 되었다고 진단한 것이다. 그리고 물질문명의 가장 큰 병을 돈병으로 파악한 것은 현실을 정면으로 본 것이다. 경제 강의에서 돈을 버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만,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만을 보아도 학문마저도 돈이 최상의 목표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더욱이 전쟁에서 대량살상을 가능케 하는 과학을 시녀로 한 군산복합체라는 기형 자본주의는 돈을 벌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돈의 다른 이름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원시사회에서는 돈이 아니라 물물교환으로 그 가치를 교환할 수 있었지만, 돈이 발명된 후에는 무한대로 돈을 축척할 수가 있다. 다보스포럼에서는 2016년에 세계 상위 20%의 사람들이 전 세계 부의 94%를 독점했다고 한다. 스위스 은행은 현재 세계 상위 1%가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현물을 돈으로 환산하고, 그 환산된 돈을 은행에 넣어놓기만 하면 무한대의 축적이 가능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욕망의 실현은 돈을 축적하는 것이다.

경제학의 원조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시장을 인간의 이타적 감정이 자기 통제를 통해 적절히 조절해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결국 그 처방을 자본주의가 무너뜨린 종교로부터 환수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중론이다. 이 자본주의 경제의 원리는 어떻게, 무엇을, 왜 라고 하는 것으로 다시 집중해서 교정시켜야 한다.

'어떻게'는 방언역사에서 보여주었듯이 소외된 건전한 노동이 주가 되고 돈이 종이 되는 삶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무엇을'은 폭주하는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는 소욕지족과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 속에 자리이타의 공존과 나눔으로 전환하는 삶이다.

'왜'는 부탄이 국민총행복지수를 제시한 것처럼,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통한 자신과 세계의 지속적인 행복과 평화를 위한 것이다.
결국 원불교의 교의야말로 현실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처방전에 다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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