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상 작가/북일교당
얼마 전에 〈그림과 함께 보는 원불교 교전〉이 새로 출간되어 일원상 아래 모셔두고 읽기 시작했다. 예전 교전과 달리 문장이 현대화되어 있어서 일단 반가웠다. 물론 세련되거나 일정한 수준의 문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쉽기는 했지만 이렇게 새로운 노력을 한다는 것이 너무 반가웠다. 그러나 반가움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첫 번째로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에 대한 '친절한' 설명도 없었다. 개인의 작품이 지닌 창조성과 저작권에 대한 명시적 기록이 없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무지이거나 억압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삽화라고 할지라도 작업료나 작품료를 지급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그 저작권을 명시하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두 번째로 문장이 바뀐 것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었다. 원(原) 〈대종경〉의 문장이 지닌 어떠한 문제 때문에 〈그림과 함께 보는 원불교 교전〉의 문장을 현대적으로 바꾸었는다는 설명이 교전의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에 나는 경악했다. 적어도 머리말을 두어 〈그림과 함께 보는 원불교 교전〉을 출간하는 이유와 그 내용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최소한의 설명을 했어야 한다고 본다. 들리는 말로는 청소년을 위한 교전이라고 했다는데, 교전의 그 어디에도 청소년을 위하여 제작했다는 표현이 없다.

세 번째로 교의품 14장에서 심각한 오류가 발견되었다. '교의품 14'에서 '죄복'을 '화복'으로 바꾼 것은 대종사의 말씀을 임의로 바꾼 것에 해당한다. 죄복의 개념적 뜻은 화복이 아니다. 죄복과 화복의 뜻풀이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원불교대사전〉만 보더라도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청소년이 보기에도 죄복이 쉬운 단어이지 화복이 쉬운 단어가 아니다. 죄복은 원불교의 사상 중에서 인과응보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죄복은 대종사뿐만 아니라 정산종사도 수차례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말한 개념인데 그것을 화복으로 바꾼 것은 무지를 뛰어넘는 매우 심각한 사상의 왜곡에 속하는 일이다.

문장이나 용어를 쉽게 쓰고 사용하는 일은 참 좋은 일이다. 대종사도 〈대종경〉에 대해 함부로 장엄하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하였다. 비록 문장이 쉽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성리를 깊고 넓게 공부해야 한다고도 말하였다.

죄복은 그 성리를 공부해야 하는 중요한 사상적 용어이지만 화복은 그에 못 미친다. 더구나 화(禍)는 죄의 결과로 드러난 벌이며 재앙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화를 죄로 바꾸어 사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림과 함께 보는 원불교 교전〉의 출간에 관계된 분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화복을 죄복으로 돌려놓는 작업을 하기 바란다. 머리말도 두어 〈그림과 함께 보는 원불교 교전〉을 출간하는 이유와 무엇이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도 친절히 알려주기를 간곡히 바라는 바이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변명과 설명으로 대충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교전'과 관계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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