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파면은 헌법적 정의 세운 판결입니다"

▲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은 새 지도자는 국민의 봉사자라는 생각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8명의 헌법재판관, 만장일치로 파면 선고
진보ㆍ보수 분열 아닌 애국심에 근원한 심판
촛불혁명은 주권 국민으로 품격 있는 민주주의 완성


"나는 헌법재판관들의 애국심을 믿었습니다. 재판관들이 온전한 마음으로 취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격려했습니다. 이번 심판은 재판관들이 깊이 생각하고 숙고한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10일 헌정사상 첫 대통령 파면이라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나자 김종대(70·법명 성대) 전 헌법재판관은 "선배로서 재판관들을 정서적으로 지원했고, 직간접적으로 격려했다"고 말한 뒤 이렇게 말했다.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으로 대한민국은 소용돌이 치고 있다. 지난 90여 일간 헌법재판소는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헌법재판관들은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의 견제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공정한 재판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와 인터뷰는 (사)부산여해재단 이순신 학교에서 본사 송인걸 사장이 배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헌법재판소는 원래 한 달에 한 번 재판을 엽니다. 그런데 국가적 위기 상황에 일주일에 한 번씩 재판을 여는 등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위해 최선을 다했죠. 후배들은 공휴일을 반납하며 변론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심판 중 헌재를 모독하는 대통령 측 변호인단의 지나친 언사에도 인내심을 갖고 판결을 이끈 후배들에게 감사와 존경심을 전합니다. 내가 재판관이었다면 재판정을 모독했던 변호인을 감치시켰을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강성 발언을 쏟아낸 것은 법치국가로서 헌법재판소가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심판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파면 결정은 헌법적 정의를 세운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주인이 국민이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을 뿐 아니라 대통령도 한갓 국민의 봉사자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겁니다. 둘째로 통합의 재판이었습니다. 8명의 재판관들이 만장일치로 대통령 파면을 결정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했다면 나라가 더 어려워졌을 것입니다. 헌재 심판이 갈리면 여론도 갈리기 때문에 애국심에 근원한 만장일치 심판이 더 이상의 분열을 막았다고 봅니다."

사실 우리나라 헌법은 미군정 하에 만들어졌다. 1947년 7월17일에 제정된 헌법은 국민이 주권자임을 밝혔지만 실제는 권력자들이 주인 행세를 했다. "처음 만들어진 헌법은 국민 주권시대를 연 천지개벽이었죠. 그런데 누구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국민들이 쟁취한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죠. 서유럽은 18세기부터 피를 흘리며 시민정신을 키워오면서 민주주의가 정착됐습니다."

그가 국민들이 주권자임을 눈뜨게 된 사건으로 4.19혁명과 6월 항쟁 그리고 최근 일어났던 촛불혁명을 꼽았다. 물론 더 많은 민주화운동이 있지만 저항운동을 통해 국민이 주인이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촛불혁명은 주권 국민으로서 품격 있는 민주주의를 완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많은 국민들이 탄핵 반대(일명 태극기 집회) 진영을 안아줘야 합니다. 새 지도자가 뽑히면 좌우 이념을 떠나서 뭉쳐야 하고, 새 지도자는 봉사자라는 생각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차기 대통령은 철저히 국민에게 봉사하는 지도자를 뽑아야 합니다."


이순신 리더십, 사랑ㆍ정성ㆍ정의자력 조화롭게 작동해야
교단 역동성 잃어, 역사의 뒤안길로 잊어질까 염려
수위단원 피선, 원100년 교헌개정 실패 안타까워
대변혁의 틀은 교헌개정에서 시작, 개혁 작업 속도내야



그가 지도자를 봉사자로 칭하는 것은 이순신과 관련이 깊다. 이순신 연구로 반평생을 보냈기 때문이다. 국가적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청하는 리더십의 표상이라고 역설했다. "원불교 신앙을 15세에 했다면 이순신 장군에 대한 공부는 26세 공군 법무관 시절부터입니다. 정훈교육을 위해 서점에서 이은상 선생이 쓴 〈이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을 탐독하면서 여해(이순신의 字)의 진면목을 알게 됐지요. 이후 이 책은 〈교전〉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내 인생의 스승이 소태산이라면 공직자로 이끈 스승은 이순신 장군입니다. 지금 내 속에 소태산과 이순신은 하나입니다."

그는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를 비롯해 〈이순신 평전〉, 〈여해 이순신〉, 〈내게는 아직도 배가 열두척이 있습니다〉를 펴낼 정도로 연구에 매진해 왔다.

"대통령 파면 시대에 이순신의 전략 전술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필요한 것은 이순신의 리더십이죠. 왜 거북선을 만들었을까 이렇게 묻고 또 묻고 계속해서 물으면 이순신의 내면의 가치 회로가 나옵니다. 백성에 대한 사랑, 정성, 정의와 자력 이 네 가지가 조화롭게 작동했던 사람이 이순신 장군입니다."

이순신 학교는 이 가치 회로를 찾아내 세상을 살려낼 인재를 키우는 곳이다. 그의 이순신 학교 구상은 세월호 참사로 인해 앞당겨졌다. 어느 누구도 자기를 놓고 공동체를 생각한 사람이 없어서 발생한 대형참사가 세월호였다. 그는 세월호 참사는 심지(心地)가 물질적 가치로 꽉 차 이기심이 만들어낸 것으로 당시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세월호 참사가 있던 그해 9월에 서울과 부산에 (사)여해재단 이순신학교가 동시에 설립됩니다. 여수는 그 다음 해에 만들었죠. 3기 이순신 아카데미를 통해 전문 강사 230여명을 길러냈습니다. 지난해부터는 이사장직도 모두 놓고,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죠. 각 지역마다 명망가를 이사장으로 모셔 작은 이순신을 길러내는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학교는 취직 후 3년 미만 청년, 대학 4학년(취직과 연계), 일반인 대상 교양반 등 3가지 방향입니다. 2, 3개월 장단기 과정을 통해 일주일에 3시간 학습을 하고 있죠." 그가 추구하는 길은 결국 정신개벽으로 귀결됐다. 미래세대가 물질적 가치를 줄이고, 정신적 도덕적 가치를 확장시켜 균형 잡힌 작은 이순신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성주성지 사드배치 문제로 옮겨졌다. "사드에 관한 나의 입장은 지금 정치인 중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의 입장과 대동소이합니다. 즉 위험한 전쟁무기가 한반도에 설치된다는 것은 자칫 이 땅이 강대국의 싸움터가 될 소지가 많습니다. 남북한 평화적 생존을 걱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국회 동의 등 충분한 토론과 논의로 절차적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력 국방을 못한 우리의 처지를 한탄했다. 70년간 미국의 국방을 의존했으니 우방인 미국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도 의리적으로 반하고, 국익 역시 도움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반대와 우리 국익을 위해서라도 상대국들과의 외교적 노력을 통해 상생의 길을 찾아본 뒤 확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일부 지도자가 밀실에서 결정해 시행하는 것은 절대 옳지 않다고 역설했다.

부산 원경영인회를 재정비해 교화에 힘쓰고 있는 그는 '지역교화 활성화'가 요즘 화두다. 최근 발표된 종교인구조사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한 그는 절박한 심정에서 재가 조직을 강화해 교화를 돕고 있다. "교단의 가장 큰 목표는 교도 수를 늘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절박합니다. 원불교의 힘도 교도 수에서 나오기 때문에 교단의 총 역량을 모아야 해요. 55년 동안 교도생활을 했지만 교화는 오히려 학생회 때가 더 활발했던 것 같아요. 교당이 역동성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 부산지역만 보더라도 70대 어르신 교도들이 대부분입니다. 제생의세를 누가 실천할까요.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를 개최했지만 교화 현실은 퇴보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교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을까하는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수위단원으로 피선돼 5년 차에 접어든 그는 재가단원으로서 안타까움을 전했다. "수위단회에 들어가서 회의록 낭독, 상황보고를 줄이는 등 회의의 효율화를 주문했죠. 그리고 법치교단을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로 〈교헌〉 개정 작업을 추진하게 됩니다. 당시(원기98년)는 교단 백년을 앞두고 교도들의 변화 요구가 상당했을 때입니다. 교헌개정특별위원회 출범 역시 역대 최고의 전문가들이 참여할 만큼 기대가 컸죠. 교단지도체제, 연원불, 수위단회 대개편 등 개정안을 만들었지만 순항하지 못했습니다."

100차례가 넘는 회의와 공개토론회를 거치는 등 치열하게 진행했지만 교헌개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얼마나 아쉬움이 컸던지 중앙총부 가는 일이 싫어질 정도였다. 그의 고충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교헌〉 개정을 실패한 것은 오로지 나의 책임이 컸습니다. 원불교 종교법의 이해가 부족해 세속법만 추구하다가 개정 작업을 실패한 거죠. 하지만 교단 개혁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현재 교정원 서울이전은 교헌개정을 해야 가능한 구조입니다. 대변혁의 틀을 교헌개정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가 다시 〈교헌〉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은 시대화·대중화·생활화라는 소태산 대종사의 창교 취지가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됐다. 수위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의견이 부결된 사례도 전했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로 인한 대산종사탄생100주년기념대법회 축소', '〈대산종사법어〉 교서 편정 및 성탑 조성 반대' 등을 주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종대 교도는 원기49년 부산진교당에서 입교한 뒤 원기97년 호법 수위단원에 선출됐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부산지방법원 판사, 부산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창원지방법원장, 헌법재판관(장관급)을 역임했다. 남천교당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