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산제법성지 실상초당터와 석두암터 진입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일원대도비가 보인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에 주석하며 원기5년 4월 새회상 교강을 발표했다.
변산 제법성지는 소태산 대종사가 봉래정사(蓬來精舍)에 머물며 교법을 반포한 곳으로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에 위치해 국립공원 변산반도의 중앙에 있다. 변산반도는 해안 쪽을 외변산, 내륙 쪽 골짜기를 내변산이라고 하는데 변산 제법성지 사적지들은 내변산에 있다.

〈원불교교사〉에 보면 소태산 대종사가 회상창립의 준비를 위해 휴양처를 물색하며 원기4년 3월 오창건과 함께 부안 봉래산(변산)월명암을 찾았다고 전한다. 대종사는 월명암에서 10여 일을 머문 후 돌아와 7월 말에 정산종사를 보내어 미래의 근거를 정하고, 10월에 이르러서 몇 해 동안 수양할 계획을 세우고 월명함으로 이동했다.

혈인기도를 마치고 교법을 제정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대종사는 이곳에서 교단 초기 인연들 특히 익산 총부(현 중앙총부) 건설의 인연들을 만나면서 원기9년(1924) 5월까지 기거했다. 원기5년 4월 대종사는 봉래산에서 새 회상의 교강을 발표하니, 이것이 우리회상 교리의 신앙과 수행의 표본인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이었다.

변산성지에 대한 수호를 위해 교단적으로 본격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원기64년(1979)부터다. 제173회 임시원의회에서는 변산성지의 수호기지 확보를 위해 '원광선원'을 하섬수양원 변산분원으로 기관 승인했다. 동년 7월28일부터 3일간 정토회교당 청년 17명이 봉래정사 옛 집터 정지작업 및 순례도로 보수작업을 실시했다.

원기65(1980년) 7월17일에는 변산제법성지에 ‘봉래정사 석두암터’ 비와 ‘일원대도’ 비를 건립했다.

봉래정사 실상초당터와 석두암터

소태산 대종사가 교법을 제정한 곳인 봉래정사는 현재 실상초당터와 일원대도비가 있는 석두암터를 통칭해서 부르고 있다. 변산은 금강산과 같은 산이라해서 소금강(小金剛) 으로 여겨 금강산의 별칭인 봉래산의 이름을 따 그 수양처를 봉래정사라 했다.

대종사가 월명암에서 10여 일 유숙 후 영산으로 돌아와 7월 법인성사를 마치고,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 당시 선승으로 이름 높은 백학명 선사의 상좌로 있게 했다. 이 후 저축조합의 후속 사무를 제자들에게 부탁하고 12월 월명암으로 들어갔을 때 송적벽과 김남천 등이 시봉하기를 간청했다. 실상사 옆편에 수간의 초당을 매입해 간고한 살림을 시작했으니 이곳이 실상초당이다. 대종사가 백학명 선사에게 하산의 뜻을 밝히자 그가 산아래 실상동에 거처를 주선했다. 실상사 옆 마을에 배씨라는 사람이 살림집과 전답을 내놓아 매입하게 됐다. 당시 집은 배씨의 소유였으나 대지는 실상사 소유이므로, 2칸 집과 아울러 근방의 논 네 마지기와 밭 경작권까지 사들였다. 개울 물길을 마당 앞으로 돌리고 초가 2칸 집에 한 칸을 더 늘려 삼간초가로 증축했으며 비용은 이만갑이 부담했다. 월명암에서 실상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원기5년(1920) 2월이었다. 실상초당은 실상사 쪽을 바라보며 방 2칸 부엌 1칸이 있었고 본채와 정면으로 마주보는 헛간 2칸이 있었다. 본채 입구 쪽에 첫 번째 방을 대종사가 사용했다.

대종사는 실상초당에 머문 지 1년 반 만에 다시 새 집 하나를 마련했다. 갈수록 찾아오는 신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숙소의 부족을 느낄 때 김남천·송적벽의 발의로 원기6년(1921) 음력 칠월에 공사를 착수했다. 신축기지는 천왕봉 아래, 거북바위 옆에 터를 정했다. 실상초당 옆 작은 밭 다랑이를 지나 잠시 대밭 비탈을 올라서면 바로 거북바위 오른쪽이다. 개울 건너 앞산의 인장바위가 한눈에 조망된다.

터의 주선과 재목 보조는 월명암 주지 백학명 선사가, 터를 고르고 축대 쌓는 일은 송적벽이, 목수 일은 김남천, 건축기간 중 식량과 잡비 일체를 이만갑과 구남수가 맡아 동년 음력 구월에 초당을 준공했다. 석두암 2칸 초당은 흙과 짚을 잘 개어 쌓은 흙집이다. 외벽은 벽회를 발랐고, 방안 천정을 만들고 벽에 도배를 했다. 2칸방은 가운데 칸막이를 지르고 뒷면에 각각 벽장을 넣었다. 방문은 한식으로 세창살 여닫이 쌍문을 달았고 각방의 측면에 외문을 내었다. 방문을 열면 전면에는 조금 넓은 마루, 좌우에도 반간 정도씩 마루를 달았다.

초당 우측에 아궁이를 내어 두 방에 군불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까대기를 달아내어 비바람을 막았다. 석두암 앞에 토사를 막기 위해 축대를 쌓았으며 거북바위 뒤에 큰 항아리를 하나 묻고 까대기를 쳐 뒷간으로 이용했다.

소태산은 거북바위 옆의 이 초당을 '석두암'이라 했다. 백학명이 검은 바탕의 목판에다가 흰 글씨로 옥호를 써 방문 위에 걸었다. 대종사는 스스로 '석두거사(石頭居士)'라 칭했다. 신축 2칸 초당 석두암은 소태산의 거실로서 최초의 조실(祖室)이 된다. 방 하나는 석두거사의 처소, 다른 하나는 남자 제자들의 방으로 사용했다.

대종사가 봉래정사를 떠난 뒤, 경상도에서 이주해 온 이춘풍이 실상동으로 들어와 봉래정사를 수호하며 스스로 봉래산인(蓬萊山人)이라 칭했다. 이춘풍의 가족들이 길룡리로 이사한 뒤에 이보국ㆍ이준경 등이 한때 봉래정사 수호주로서 주재하다가 이후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퇴락되어 버렸고, 원기33(1948년) 오창건이 1개월간 머물며 개축공사를 하여 초가지붕을 양철지붕으로 개수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일대가 소실돼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 원기66년 5월21일 일원대도비 봉고식이 있었다. 대산종사의 휘호 일원대도를 음각으로 새겼다.
일원대도비

일원대도비는 자연석 위에 기각을 세우고 그 위에 3층 기단을 얹은 후 다시 그 위에 높이 180㎝의 오석으로 기념비를 세워 총 높이 369.6㎝ 크기로 건립했다. 전면에는 제법성지를 기념하는 대산종사 휘호일원대도(一圓大道)를 음각으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제법성지 비문을 적었다. 이 비는 변산성지사업회가 제법성지 장엄공사 1차 사업으로 교강 반포 60주년을 기념하여 원기65년(1980) 7월17일 변산면 중계리 석두암터에 세웠다. 본래는 하섬수양원 변산분원 사업으로 건립계획을 세워 추진했으나, 교단적인 성역 사업을 일개 기관에만 전담시킬 수 없다는 원의회의 결의에 따라, 1980년 1월 교단적인 사업으로 기구를 확대하고 변산성지 사업회를 발족시켜 총재에 대산종사, 회장에 이공주를 추대하고, 실행위원장에는 제법성지 성역사업을 추진하던 이공전 하섬수양원장을 임명해 진행됐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여기는 원불교 제법성지 봉래정사 석두암(圓佛敎 制法聖地 蓬來精舍 石頭菴)터! 원기4년 기미 10월 소태산대종사 변산((圓紀 4年 己未 10月 少太山大宗師 邊山)에 드시어 월명(月明)에서 법인기도회향(法認祈禱回向)하시고 이 아래 초당(草堂)에서 새 교강(敎綱)펴신 후 여기 정사(精舍)짓고 갑자 4月까지 정산종사(鼎山宗師)등 2~3 제자(弟子)를 데리시고 새 교법제정(敎法制定)과 숙연(宿緣)들 제우(際遇)로 새 회상공개(會上公開)를 준비하시니 거룩할사 이 터전! 새 회상원음(會上 圓音)의 산실(産室)이어라.

원기 육십오년 사월 변산제법성지사업회(圓紀 六十五年 四月 邊山制法聖地事業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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