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구례교당 순교, 주무, 단장으로 교무님을 지성껏 보필하던 어머니가 너무나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세수 53세 원기62년(1977) 늦은 봄날 군인이었던 나는 부음을 접했다.

'다음 생은 꼭 전무출신을 하겠노라' 서원하고 떠나신 어머니! 구례교당 최초의 정식 법마상전급에 올라 꽃다운 법보에 오른 나의 연원이자 도반인 어머니! 교당에서 초파일 연등 만들다 잠깐 집에 일이 있어 갔다가 쓰러져서 손가락에 물든 파랑, 빨강, 노랑의 색깔도 지우지 못하고 열반에 드신 어머니! 어린 동생들에겐 "우지마라 우지마라 엄마 못 떠난다" 하시며 건넌방서 꺼이 꺼이 울음을 삼키던 교무님. 우리 가족은 정서적으로 원불교 집안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원기60년 5월 대산종사께서 구례 교당을 방문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입 재수를 준비하던 나는 별 떨림도 없이 성가 1곡과 '울어라 열풍아'란 노래를 기타 반주에 맞춰 멋들어지게 공양했다.

"너 전무출신해라. 법흥을 잘 일으키겠다." 만면에 미소를 지은 대산종사는 나의 손과 어깨를 두드려주며 칭찬과 격려를 해 주었다. 그 이전의 많은 법사님들이 다녀 가시며 '전무출신하면 잘 하겠다'하는 말씀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내가 연원한 동급생 친구가 원불교학과를 지원하고 또 다른 후배들이 줄줄이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내가 먼저 가야 할 길인데 마치 선수를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집안의 장남에 장손이라는 굴레와 또 다른 장애가 나의 영생길을 더디게 하였다.

자연의 리듬을 따르지 않고 생존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고 이기려고 부단히도 노력하며 살던 세월이었다. 밤을 새거나 낮과 밤이 바뀌어 생활도 해보고, 순리를 거부하며 자행자지하면서도 마치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는 오만과 만용을 부렸다. 기아자동차 전국 영업사원 대상 3차례 수상, 동기중 가장 먼저 지점장 발령받고 승승장구했다. 세상의 좋다는 경험은 다 하면서 유한한 인생을 진지한 성찰없이 자신의 안위와 욕심만을 챙기며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던 어리석은 시절을 보냈다. 극하면 변한다는 자연적 인과를 여실히 경험하며 '업장이란 이런 거로구나' 호되게 날벼락 맞고 그것을 계기로 참회하고 기도하고 오랫동안 멀리했던 교당(서울 강동)을 찾아 뒤떨어진 공부에 매진하던 어느 날 내 자신의 삶이 초라하고 시시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누구나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꿈꾸지만 현실은 늘 실망스러웠다. 가정은 금 간 유리창 같고, 정치는 좌절과 혐오만 안겨왔다. 과학은 해결책을 내놓기는커녕 위협만 더 한다. 물질은 오늘도 끊임없이 개벽되고 있으나 현하 정신의 개벽은 후진 기어를 놓고 달리는 자동차 마냥 끝 간 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세상의 애락에 파묻혀 대충 이렇게 흘려 보내도 되는 것인가? 이렇게 마무리져도 되는 것인가?' 깊은 회의와 고민은 이내 다르게 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뭔지 확실히 잡히지는 않았으나 인생 장년기에 '그저 그런 노인으로 살면 안 되겠다' 싶은 것은 확실했다. 남은 인생을 불사를 만한 일에 이 한 몸 부셔져라 바쳐 빠져 들고 싶다는 생각과 사리 사욕과 금전욕 따위가 아닌 '아! 그 사람이 있어 다행이다'라고 말 할만한 값진 일을 하고 싶어졌다. 구청 구민회관에서의 노년 설계 강의와 노래방 강사도 재미있고 보람은 있으나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항상 나를 옥죄었다.

그러던 차에 기간제전무출신 2기 추가 모집 광고가 났다. 이 길이 나의 마지막 길임을 인지했다. 내 영생 행복의 길을 향도해 준 우리 회상이면 내 남은 인생을 불사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결론지었다.

/기간제전무출신, 둥지골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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