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도웅 교도/대현교당
독경의 중요성에 대해서 의견을 피력한 지도 어언 30여년이 흘렀다.
몇몇 훈련원에서, 여러 교당에서 수십차례 강의를 해왔다. 개별 설득도 해보았으나 특히 교무님들께서 반응이 없어 보인다. 이런 생각이 날때마다 나의 부족함을 되돌아 보곤한다.

독경은 경문을 소리내어 읽거나 외우는 것으로 운곡 있는 독경이어야 한다. 운곡이란 운율(韻律)과 곡조를 뜻하며 음의 고저 장단 강약 등이 어우러진 같거나 비슷한 가락이 반복되는 음의 흐름을 말한다. 독경은 〈불교의례〉 범패에서 유래된 것으로 '가곡' '판소리'와 함께 우리 국악의 3대 성악곡 중의 하나이다.

음악성이 있는 작곡된 운곡으로 정형화된 독경을 모든 대중이 함께 염송할 수 있다면 그 독경 소리의 아름다움에 감동되어서 신앙심이 우러나오고 상쾌함을 맛볼 것이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일념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

무시선강령'에서 삼학병진으로 '일이 없을 때는 염불 좌선으로 일심을 양성하고, 일이 있을 때는 그 일심으로 일을 하면 정의가 양성된다'고 했다. 즉 염불 좌선이 삼학 병진의 뿌리가 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특히 염불 독경을 대중화 생활화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①통일된 운곡으로 독경하는 것이 좋다는 교도가 있고, ②자유로운 운곡으로 독경하는 것이 좋다는 교도가 있다. ①의 경우, 가락이 통일되고 음악성이 있어 독경 소리에 재미를 느낄 것이고, ②의 경우는 가락이 서로 달라 음악성도 없고 독경 소리가 불협화음이 되어 잡소리만 무성할 뿐이다. 그러니 재미가 없고 안정·일념을 만들 수 없다. 그리고 여성이 주례하면 남성 대중이 따라하기 어렵고, 남성이 주례하면 여성 대중이 따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이는 음역문제와 주례하는 교무님마다 독경의 운곡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태껏 해왔던 1옥타브 이상의 음역으로 하는 독경, CD로 나온 독경들이 아무리 듣기 좋아도 남·여의 음역 차이 때문에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필자는 음역문제 해결을 위해 남녀노소 특히 남성 여성 공히 편하게 낼 수 있는 공통 음역을 찾기 위해 실험을 통해 그 가능성(90%)을 찾아 낼 수 있었다.

1옥타브(완전 8도)이상의 음역에서 독경해 오던 운곡을 완전 5도의 음역으로 줄여 악보상의 공통음역 내에서 쉽게 부를 수 있도록 작곡된 악보의 운곡대로 독경하면 대중성과 음악성을 살려 염송할 수 있고 재미가 있으니 생활화할 수 있다고 본다.

단 유의점은 피아노 키보드로 주례 부분의 가락을 먼저 친 다음 그 음높이의 가락대로 주례자가 선창한 후에 다함께 악보의 운곡대로 염송함이 좋다는 것이다. 염불, 영주, 청정주 그리고 일원상서원문, 반야심경 까지만 시도해 봄이 어떨까. 이러한 독경이 좋다고 생각되면 적극적인 활성화 작업이 필요하다.

공감하는 교무님들께서 앞에 나서서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재가교도들은 아무리 하려고 해도 공염불이 되고 마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다. 그리고 재가교도들은 그 뜻을 따라야 한다. 아름답고 부르기 쉬운 대중성 보편성 있는 운곡들이 다수 나와야 한다.

필자는 그러한 운곡들을 작곡해서 보급하는 일에 노력하고 있다.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영산선학대학교 커리큘럼에 독경 좌선 과목을 정규과목으로 신설해서 예비교역자들에게 이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교수가 올바르게 구체적으로 지도해야 한다.

또한 매년 정기교무훈련 때에도 마찬가지로 정규과목으로 정해서 전문 강사를 초빙해서 제대로 배워야 한다. 출가든 재가든 모르면 배워야 하는 것이다.

단전주 소리선을 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단전주 소리를 체득해야 독경을 오래해도 성대가 피로하지 않으며 소리도 수월하게 낼 수 있고, 수승화강이 잘 되어 맑고 윤활한 침(감로수)이 나오는 것이다. 성대에서 난 소리가 하단전으로 내려가 태극혈(회음혈)이 울리면 그 소리가 동시에 가슴 머리 등 몸 전체에 울려서 정신과 기운이 상쾌해 지는 것이다.

독경의 운곡이 좋으면 갖다 쓸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에서 벗어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확산시켜 나가는 운동을 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져본다. 이 운동이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이면 출가든 재가든 인정하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풍토, 배우려고 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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