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응주 교무/법무실
사량으로 알아내려 말고 관조로써 깨쳐 얻으라

모습과 형태에 집착말며 말과 형상에 의지말라



佛言- 吾法은 念無念念하고 行無行行하고 言無言言하고 修無修修니 會者는 近爾나 迷者는 遠乎인저 言語道斷이라 非物所拘니 差之毫釐하면 失之須臾니라.
"부처님 말씀하시되 내 법은 함이 없는 생각을 생각하고 함이 없는 행을 행하고 함이 없는 말을 말하고 함이 없는 법을 닦는 것이니 아는 이는 곧 당처를 떠나지 아니하나 미(迷)한 이는 천리나 멀어지나니라. 만일 도를 닦는 사람이 진리에 호리라도 어긋남이 있다면 잠간 사이라도 능히 본심을 지키지 못하리라."

〈사십이장경〉 18장은, 부처님의 법은 생각하되 무념(無念)으로써 생각하며, 행하되 무수(無修)로써 행하며, 말하되 무언(無言)으로써 말하며, 닦되 무수(無修)로써 닦는 것이니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부처님의 법을 바로 알 수 있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은 부처님의 생각과 행동과 말씀과 수행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말로써는 표현할 수도 없고 사물에도 구애되지 않는 것이기에 털끝만한 차이라도 생기면 눈 깜짝할 사이에 놓쳐버리게 된다는 뜻이다. 즉, 부처님의 법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해지는 인위적인 유위법이 아닌 무위법(無爲法)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무슨 말이나 어떤 행동을 해도 자연스럽게 진리와 하나가 되지만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아는 체를 해도 결국은 법과는 멀어지게 된다. 진리란 언어가 끊어지고 사물에도 구애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염념불망 지키고 알아서 사용해야 한다. 만일 잠깐이라도 방심하게 되면 그 자리를 놓치기 쉬우니 빈틈없이 마음을 챙겨야 결국은 본심을 지킬 수 있다. 일원상서원문의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가 바로 이것이다.

염무염념(念無念念)하고, 생각을 하되 어떤 의도나 사심에 바탕하지 않고 텅 빈 마음에 바탕해서 생각한다.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 마음에 이미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면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무심에 바탕한 마음, 상없는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다.

행무행행(行無行行)하고, 행동을 하되 저절로 되어지는, 무심과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부처님의 행동이다. 그렇지 않고 누구를 위한 행동, 특정한 의도를 가진 행동은 바른 행동이 될 수 없다.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 상없는 행이 부처님의 행이다.

언무언언(言無言言)하고, 진리는 말로써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진리를 깨친 분들은 중생제도를 위해서 말로써 진리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언어로 표현된 진리가 무언(無言)에 기초하지 않으면 결국 진리를 설명하려고 한 말이 진리와 어긋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크게 주의해야 할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도 게송(偈頌)을 발표한 후 "유(有)는 변하는 자리요 무(無)는 불변하는 자리나,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가 이 자리며, 돌고 돈다, 지극하다 하였으나 이도 또한 가르치기 위하여 강연히 표현한 말에 불과하나니, 구공이다, 구족하다를 논할 여지가 어디 있으리요.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이니 사량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고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고 말했다(〈대종경〉 성리품31장).

수무수수(修無修修)는 닦되 닦음이 없음에 바탕한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을 하면서 반드시 좌선 혹은 염불을 해야 한다거나, 특별한 경전을 봐야하며, 어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절대 도를 얻을 수 없다라고 하는 등에 집착하는 수행은 결코 원만한 수행이 아니다. 또한, 자신이 하는 공부를 타인이 따라하지 않으면 무시하는 것도 편협한 수행이다. 부처님도 비록 강을 건너기 위해 뗏목을 만들었지만 강을 건넌 뒤에는 뗏목을 버리고 가야한다는 비유처럼 우리의 수행은 저 언덕으로 가기위한 뗏목인 것이다. 어떤 재료로 만든 뗏목이든지 강을 건너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한 두가지 수행에 집착하는 것도 옳지 않다.

회(會)는 이해하다, 깨닫다는 뜻이고, 미(迷)는 헷갈리다, 길을 잃다라는 의미이다.

언어도단 비물소구(言語道斷 非物所拘)는 진리의 속성에 대한 표현으로 진리는 말로써 표현될 수 없기에 말에 속아서는 안되는 것이며, 물질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기에 특정한 모습이나 형태에 집착해서도 안된다. 즉, 말이나 형상에 의지하지 말라는 뜻이다.

호(毫)는 가는 터럭, 리(釐)는 저울의 아주 작은 단위로 둘 다 아주 적은 것을 의미한다. 수유(須臾)는 잠깐, 잠시라는 뜻이다.

이 법문 전체를 보면 금강경의 핵심인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뜻과 일치한다. 어떤 생각이나 말, 행동이나 수행을 하더라도 상에 주착되지 않은 마음을 바탕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수행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중국 선종의 3대 조사 승찬의 '신심명(信心銘)'에 지극한 도를 얻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간택심과 증애심이 털끝만큼 이라도 남아있다면 결국에는 하늘과 땅처럼 사이가 벌어진다고 하였다. 도를 얻은 것과 얻지 못한 것이 큰 차이이지만 그것의 출발점은 종이 한 장 차이처럼 아주 작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공부인으로써 두려워하고 주의할 일이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