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원우 원로교무
대종사성탑 뒤에 보관했던 받침돌이 사라져

스승의 숨결 살아있는 유물에 관심 가져야


스승님이 그리운 유월이다. 올해 초 기회가 닿아 석가모니 탄생지를 순례했다. 석존의 탄생지는 아침이면 히말라야 산맥이 보이면서 공기가 참 맑고 청정했다.

석가모니는 네팔의 영토 타라이 지방 룸비니동산 사라나무 숲에서 태어났다. 이곳을 기념하고자 후인들이 장소의 표시로 흙벽돌을 쌓아놓았다. 지금은 집 한 채 정도의 높이(4m)로 남아있지만 오랜 세월이 말해주듯 바닥에 깔린 흙벽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유적이라고는 허술하기 그지없는 이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옆에 큰 건물을 지어 관리하며 참배객들을 맞이한다. 심지어는 카메라촬영이나 휴대폰 사진 한 장 못 찍게 할 정도로 엄숙하게 성지를 관리하고 있어 그날의 나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우리 교단 유물 유적 관리를 한번 살펴보자. 우리 회상은 5만년 대운을 타고난 회상인데, 대종사의 자취를 어떻게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해줘야 하나, 하는 문제는 총부에 근무할 때 나의 고민이기도 했다. 부실한 유물 유적 관리에 대해 몇 가지 짚어보겠다.

첫째는 대종사가 열반에 들 때 사용한 의자와 이리병원이다. 열반에 들던 이리병원(익산시 중앙동 소재) 터는 원기99년 12월에 매입해 관리하고 있지만, 아직 성적지 스토리텔링이나 장엄이 안 되고 있다. 대종사는 원기28년 5월27일 저녁8시 반경 이리병원에 입원해 6월1일 오후2시에 열반에 들었다. 당시 이리병원은 익산에서 가장 큰 화양식 2층 건물로, 대종사의 주치의는 내과전문의 와카스기였다.

둘째 대종사가 열반에 들자 다비 후 처음 성해(聖骸)를 안치했던 약 1m 정도의 성비와 받침돌을 되돌려 놓자. 익산 금강리 수도산에서 대종사의 성체를 다비한 후 총부에 모셨던 성비와 받침돌이다. 성비와 받침돌을 그동안 계속 대종사 성탑 뒤에 보관해 왔다. 그런데 이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를 옮긴 교무도 지금은 어디에 뒀는지 모르고 있다.

셋째 송대 앞 대종사의 이야기가 담겨진 타원형 검정색 큰 돌이 대종사성탑을 정리하면서 땅에 묻혔다. 전과 같이 제자리로 되돌려 놓고 팻말을 세워 역사적인 유래를 적어놓으면 송대도 검정 돌도 더욱 빛날 것이다. 대종사 당대 대중들이 송대 부근에서 울력을 했다. 그런데 여러 제자들이 검정 큰 돌을 옮기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이때 성주에서 온 송제국 선진이 혼자서 번쩍 들어 옮겼다. 이를 본 대종사는 "보아라! 우리 제국이도 쓸 데가 있지 않느냐" 하며 제자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전했다. 송대는 정신원 건물을 짓고 재목이 남아 대종사가 직접 감독하며 지은 소중한 유적건물이다. 역사가 흐를수록 송대와 타원형 검정색 큰 돌은 더욱 드러날 것인데, 땅에 묻혀 있어 아쉽기만 하다.

넷째 대종사 성탑 끝 계단에 석두가 있어서 탑의 전체적인 품위를 높여주고, 중량감을 줬다. 그런데 주변을 정리하면서 성탑과 석두가 균형이 맞지 않아 석두를 캐냈다. 현재는 원불교역사박물관에서 그 석두를 보관하고 있다. 이 석두를 균형을 맞춰 되돌려 놓았으면 좋겠다.

다섯째 몇 년 전 총부 대각전 리모델링을 하면서 마루 바닥의 공기통을 절반으로 줄였다. 필자는 문화사회부에 이대로 두면 바로 썩어서 마루가 내려앉을 것이라고 몇 차례 건의를 했다. 또한 재정산업부에도 시정을 요구했는데 시행되지 않았다. 현재 대각전 마루를 걷다보면 그 단단했던 바닥이 약간 출렁거리면서 서서히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불교는 석가모니와 직접 연관도 없는 흙벽돌조차 성역화해 소중한 유물로 삼고 있는데, 우리의 유물 유적은 관리가 안 되니 후진으로서 갑갑하다. 대종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유물들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면 이는 교단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대종사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 하나 묻혀 놓아서는 안된다. 하찮은 돌이라도 그렇다. 잊혀지기 전에 대종사의 유물과 유적들을 하나하나 다시 점검하고, 목록에 기입해 관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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