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법신불 일원상은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이자 통종교적 체험의 궁극적 세계이다. 믿음을 중시하는 계시종교와 자성의 깨침을 강조하는 개오종교가 융화되는 장인 것이다. 실제로 수행은 믿음의 힘으로 완성되고, 믿음은 수행을 통해 구현된다. 일원상의 진리가 절대적 타력과 절대적 자력을 종합하는 종교역사를 새롭게 쓰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르침의 체험이 일상화 돼야 한다.

원불교의 수행을 마음공부를 비롯해 정시·동시선, 대중선, 생활선, 영육쌍전선, 무시선 등으로 부르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일원상 진리의 체득을 향한 방편이 원융하기 때문이다. 그 목표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의 부처행을 나투는 것이다. 그 핵심 원리는 공원정에 기반한 견성, 양성, 솔성이다. 원불교의 수행은 여기에 다 수렴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생각해보라. 솔성의 무념행, 무착행, 중도행이야말로 수행의 궁극이 아닌가. 어떤 정치가, 기업인, 학자들이라도 이를 삶의 토대로 삼는다면, 원만구족하고도 지공무사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을까.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완전하게 드러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시선은 이러한 일원상 수행이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각여래위에 오르고, 마침내 중생을 제도하는 만능을 발휘할 때, 제생의세의 위대한 성업(聖業)이 성취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대한 수행의 성취는 무엇보다도 처음에는 삼학수행이 기본이 된다. 이 수행 위에서라야 오욕의 경계에서 마음이 부동한 심성수양과, 현실 경계에서 마음이 부동한 기질수양이 된다. 그리고 삼학의 일심, 알음알이, 실천행과 더불어 의식주가 합쳐져야 원만한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소태산이 비록 본말이 있지만 이 육대강령을 생명선이라고 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

수행은 정신수양의 방법인 선수행이 기본이다. 〈육조단경〉에 나와 있듯이, 자신에게 갊아 있는 법신의 성품, 보신의 지혜, 화신의 정행을 밝히는 것이다. 선은 행주좌와의 동정 간에 육근의 간단없는 공부가 요체이다. 좌선법에 나와 있듯이 그 원리는 정기함양, 식망현진, 수승화강, 심단기단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소유무와 시비이해를 바르게 파악하는 사리연구와 더불어 정의·불의의 취사에 대한 용맹심의 발휘를 합하여 완성된다. 말씀대로 불타의 삼학이나 이를 확장시킨 원불교의 삼학이 다 같이 일원상의 진리를 구현하는 길이며, 이 길이야말로 지식의 유무를 뛰어넘어 남녀노소 모두가 성불제중하는 대도인 것이다.

불성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고를 낙으로, 불행을 행으로 만들어 가는 삼학의 힘이 일상화된 것이 곧 무시선이다. 즉 삼학이 일취월장할 때,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를 용으로 삼는 무시선의 대기대용에 이르게 된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즉 응할 때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사용하는 일원상 수행의 솔성의 요체가 드러나게 되어 일상수행이 완전해진다.

무시선은 제법불이의 견지에서, 구경에는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의 경지를 체득해야 한다. 그 위에 확립된 불변(不變), 불염(不染), 불괴(不壞)의 자성금강심으로 이 사바세계를 불국토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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