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응주 교무/법무실
집착과 욕망을 놓지 않으니 영원히 고해속에 있다

스스로 살 복이 있으니 자손의 마소가 되지마라




佛言 - 人繫於妻子寶宅之患이 甚於牢獄하나니 牢獄은 有原赦어니와 妻子情欲은 雖有虎口之禍라도 己猶甘心投焉이라 其罪無赦니라.
"부처님 말씀하시되 사람이 처자와 집에 걸려 있음이 감옥보다 심하니 감옥은 나올 기약이 있으나 처자의 정욕은 죽어도 오히려 달게 아는 고로 그 옥을 벗어날 날이 없나니라."

〈사십이장경〉 23장은 사람이 처자나 호화로운 집에 얽매이게 되면 그 근심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심하다는 말씀이다. 감옥은 때가되면 풀려날 기약이 있지만 처자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에 설사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는 고통을 당하더라도 피하지 않고 달게 받아 들인다. 그러니 언제나 감옥에서 풀려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처자보택지환(妻子寶宅之患)이란 부인과 아들, 호화로운 집에 얽매이는 근심이란 뜻으로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부인과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녀와 그들이 함께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근심과 재앙의 근본이 된다는 말이다. 심어뇌옥(甚於牢獄)은 감옥보다 심하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죽음까지도 불사하기 때문이다. 뇌옥유원사(牢獄有原赦)는 감옥이란 죄 값을 다 하여 그 형기를 마치면 당연히 풀려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즉, 기한이 정해져 있다. 처자정욕(妻子情欲)은 부인과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욕망으로 변하였음을 의미한다. 수유호구지화 기유감심투언(雖有虎口之禍 己猶甘心投焉)이란 비록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재앙을 당할지라도 자기 스스로 그것을(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것을) 달갑게 여기어 몸을 던지는 것과 같다라는 의미이다. 처자에 대한 욕망이 너무 지나쳐서 설사 자신이 죽음에 다다를 지라도 그것을 피하려고 하기 보다는 지키다가 죽음을 택할 정도로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기죄무사(其罪無赦)란 그 죄로 부터 풀려나지 못한다. 몸과 마음이 비록 죽어 없어진다하여도 처자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놓지 않으니 영원히 고해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는 처자나 가정에 얽매이는 것이 다른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도 더 큰 고통이라고 하셨다.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그 죄 값을 다하면 시간의 장단에 따라 결국은 풀려날 기약이 있다. 그러나 처자에 대한 집착과 가정에 대한 애착은 자신의 발을 묶고 있는 밧줄과 같아서 자신이 그것을 끊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밧줄이 약해지기 보다는 점점 더 착심이 두터워져서 결국은 이번 생 뿐만 아니라 여러 생을 통해 착심으로 인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자손과 가정을 위해 착심에 대해서 선현들의 말씀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청나라의 3대 황제인 순치황제는 중국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18년간을 노력하다가 자신의 전생을 깨닫고 황제의 자리를 버리고 불교에 출가하였다. 그가 출가하면서 지은 시가 바로 '순치황제 출가시(順治皇帝 出家詩)'이다. 이 싯구 중에, 아손자유아손복(兒孫自有兒孫福)하니 자손들은 제 스스로 제 살 복을 타고났으니, 불위아손작마우(不爲兒孫作馬牛)하라. 자손들을 위한다고 말과 소가 되지 말라.

대개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게 생각지 않고 자녀들을 위해 기꺼이 소와 말이 되고자 한다. 일생을 자녀들을 위해 등골이 휘도록 뒷바라지 하다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처럼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소태산 대종사도 총부에 입선하러 왔다가 집에 있는 소소한 물건들을 도둑 맞을까봐 염려하여 일주일만에 떠나는 자손이 많고 가산이 부유한 노부인을 보시고 "사람의 착심이란 저렇게 무서운 것이다. 보이지 않는 노끈으로 단단히 묶어 가지고 기약 없는 감옥으로 저렇게 끌려가는구나. 세상의 감옥은 나올 기약이나 있지마는 저 감옥에 한번 단단히 잡혀 들어가면 일생 내지 수천만 생을 나올 기약이 아득한 것이다.(하략)"(〈대종경선외록〉 일심적공장 2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처자와 가정을 버리고 살 수 없으며, 특히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과 수도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과거 불교에서는 선과 악, 세간과 출세간 등의 이분법적 견해를 보여온 것과는 달리 원불교에서는 현실생활을 하면서 합리적이고 실현 가능한 수행의 기준을 제시해 줬다.

소태산 대종사는 한 제자의 정산종사 자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들으시고 사랑과 애착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말씀했다.

이 청춘이 여쭙기를 "큰 도인도 애착심이 있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애착심이 있으면 도인은 아니니라." 청춘이 여쭙기를 "정산도 자녀를 사랑하오니 그것은 애착심이 아니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청춘은 감각 없는 목석을 도인이라 하겠도다. 애착이라 하는 것은 사랑에 끌리어, 서로 멀리 떠나지를 못한다든지, 갈려 있을 때에 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자신 수도나 공사에 지장이 있게 됨을 이름이니, 그는 그러한 일이 없나니라." (〈대종경〉 수행품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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