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성헌 기자
소태산은 "정도(正道)라 하는 것은 처음에는 해로운 것 같으나 필경에는 이로움이 되고, 사도(邪道)라 하는 것은 처음에는 이로운 것 같으나 필경에는 해독이 돌아오므로, 그 교가 정도이면 아무리 그대들이 박멸하려 하여도 되지 않을 것이요, 사도라면 박멸하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서지 못하게 되리라"고 했는데,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가 그러했다.

국민을 속이거나 기만했던 정부들은 어김없이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을 거쳐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의로운 투쟁 앞에 사라져갔다.

얼마 전 모 프로그램의 '6월 항쟁 30주년-거리의 사람들'에서는 속세를 떠난 승려들이 돌아와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규탄했고, 교인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집회에 참가한 장면이 방영됐다. 종교인이 삐뚤어진 정치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위엄과 원칙이 있는 높은 곳을 향한 투쟁을 영원히 계속해야 합니다." 1963년 8월28일. 워싱턴에서 25만여 명의 군중 앞에 설교한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우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생전에 보지 못한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목사로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가르침을 펼쳤기 때문이 아니다. 유색인종 차별에 대해 아무도 나서지 않거나, 겨우 숨어서 이야기해야 할 정도로 공권력의 횡포가 심할 때 민중의 제일 앞에 서서 사회적 정의를 외쳤기 때문이다.

종교가 종교일 수 있는 까닭은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월항쟁이 전국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명동성당이 그 중심에 있었다.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던 대학생들은 최루탄과 철몽둥이를 휘둘렀던 공권력으로부터 몸을 피해 농성을 계속할 수 있었던 며칠간의 시간을 유지시켜 준 덕분이었다.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역사에는 언제나 종교와 종교인이 함께했다.

공산주의에서는 '종교가 마약'이라며 모든 종교적 행위가 금지당했듯이, 민주주의가 아니었다면 교단의 위치는 미약해지거나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또한 독재정치나 국정농단처럼 나라 자체가 어지러워질 때 우리가 서원한 제생의세 사업은 극도로 힘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종교와 정치가 세상을 운전하는 것이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고 한 소태산의 비유처럼 종교가 아무리 잘한다고 하지만, 국가가 어렵고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 국민의 도탄도 깊어졌다.

세계적 많은 지성인들이 원불교 교리에 감탄하는 이유는 여러 시민단체와 협약기구에서 추구하는 다양한 사회적 과제에 대한 해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부패한 종교를 제재하기 위해 '종교인 과세'를 서두르듯이, 부당한 정치 행태를 견제하는 종교의 활동이야말로 두 수레바퀴가 썩지 않고 잘 굴러갈 수 있는 민주주의의 참다운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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