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오성 교무/송도교당
항마위는 일체 중생을 불지로 인도할 바른 스승(正師)의 자격이 있다. 견성 없이는 정식법강항마위에 오를 수 없다. 항마위는 견성 없이 오를 수 없지만, 견성했다고 다 항마위는 아니다. 견성은 항마의 필수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견성이란 불지를 훤히 본 것이다. 불지를 알아야 그 자리에 이르는 성불도, 그 자리로 안내하는 제중도 가능하다. 공부인의 서원인 '성불제중'이 견성 없이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불지(목적지)를 확실히 보지 못하고 일체 중생을 그곳으로 인도할 수 없다. 참 신앙, 참 수행도 마찬가지로 견성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견성 이후라야 일체가 제대로 출발한다. 글자를 모르면 문장을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견성 이전의 온갖 행위가 다 의미 없는 것은 아니나, 견성에 대한 의지와 각고의 노력 없이는 다 헛고생이 된다.

면허증이 곧 운전실력은 아니다. 법강항마위란 육근사용 면허증을 갖춘(견성) 이가 삼학 수행을 지성으로 한 결과, 어떤 상황에서도 육근동작에 안전운전(백전백승)을 하게 된 경지다. 견성 없는 신앙 수행은, 목적지도, 어딜 가는지도 모른 채 운전하는, 소위 오렴수다.

일반적으로 견성에 대해 착각하는 것이 있다.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어마어마한 것 일거라 환상을 갖거나, 견성하면 바로 사람이 달라질거라 여기는 것이다. 견성은 엄청난 것을 보는 것이 아니며, 견성 자체로는 아무 힘이 없다. 견성을 대원정각과 혼동하는 이가 많다. 목적지가 어딘지를 분명히 볼 뿐, 아직 성불(목적지 도달)에는 한걸음도 떼지 않은 상태다. 희귀하게 있는 최상근기는 견성 즉시 성불, 육근동작 보보일체가 대성경이 되기도 한다. 사람따라 다르지만 대개는 견성 이전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자기 기질이 오랜 시일 유지되면서 자성반조의 수행을 통해 서서히 달라진다.

견성은 일원을 본 것이다. 머리로가 아니라 눈앞에 역력히 홀로 밝은 그 실체를 훤히 본 것이다. 일원은 곧 대소유무다. 대소유무 이치가 훤하다. 실지의 수박맛을 본 사람은 수박 사진을 본 것과 천지차이다. 수박맛을 봐야 갈증을, 고통을, 생사를 해결해 갈수 있다. 그림의 수박(머리로 하는 진리이해)은 삶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 진리 따로 삶 따로다. 대소유무의 이치에 걸림 없어야 시비이해를 정확히 알아 법이 백전백승하게 할 수 있다.

대소유무가 곧 나, 일원이니 그대로 살면 참 수행 참 신앙이다. 참나는 허공이므로, 허공은 죽을수가 없으므로 생로병사가 없다. 가고 올 것이 없어서 저절로 생사해탈이다. 그 자리를 모르고는, 즉 견성 없이는 생사해탈 할 수 없다.

성불이란, 훤히 본 그 일원을 육근동작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야 일거수일투족에, 육근동작에 그대로 가져올 수 있다. 자성을 모르고 자성반조 할 수 없다. 일원인 나를 떠나지 않고 사는 것이 자성반조며 참 신앙이고 수행이며 성불이고 제중이며 생사해탈이다.

현재의 법위가 실재의 법위와 다를 수 있다. 이름만 항마라면 무엇부터 해야 할 것인가. 에누리 없다. '견성을 못 한 사람은 법강항마위에 승급할 수 없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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