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성 도무/원경고등학교
작년 가을부터 올해 봄까지 우리나라는 역사상 매우 절실한 한 때를 보냈다. 9년간, 아니 더 오랜 시간 '압기'된 시민들의 에너지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고, 나라의 운명을 가를 큰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평화의 과정을 만들고 평화의 결실을 가져왔다. 계절로 봐도 참으로 절묘하다. 혹독한 겨울의 단련을 지나 마침내 봄의 솟구침을 맞이한 것은 얼마나 기막힌 상징인가. 겨울의 압기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촛불을 들었던 살아있는 사람들의 봄. 나는 겨울과 봄의 상징들이 만들어내는 과정들을 보며 두 가지가 떠올랐다.

"선한 사람은 선으로 세상을 가르치고, 악한 사람은 악으로 세상을 깨우쳐서, 세상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데에는 그 공이 서로 같다"(〈대종경〉 요훈품 34장)는 말씀이 하나다. 아울러 악한 사람은 죄를 지으며 세상일을 하니 악한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했다. 지난 시간들도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선함과 악함이 음양상승했는가. 악을 통해 선을 배우고, 선을 통해 악을 배웠던 시간들이었다.

역사는 결코 직선으로 쭉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퇴행과 반동, 정체가 끊임없이 발길을 붙잡는다. 그래서 역사는 오르락내리락하고 엎치락뒤치락하며, 거칠거칠하다. 또한 덜컹덜컹하고 출렁거린다. 그러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오르락내리락해야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에너지가 나온다. 선과 악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나아가야 더욱 단련되고 깊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경계의 힘이다.

또 하나는 어변성룡(魚變成龍)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전망하기를, 이 나라는 지금 점진적으로 어변성룡이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대종경〉전망품 23장) 아주 먼 미래가 아닌 '지금' 말이다. 그러므로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졌던 지난 격동의 시간들 역시 어변성룡의 한 과정이지 않을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개천에서 용 나기도 진실로 어렵거든 하물며 물고기가 용으로 변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한 판의 승부로 끝나는 게 아니고, 천변만화의 지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 터.

그러므로 어변성룡은 결코 낙관주의와 함께 어쩌다 다가오는 미래가 아니다. 어변성룡은 전무후무한 희망이고, 이 희망을 열어가는 과정에서 앞으로 이 나라는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하는 거대한 변화의 중심에 서 있을 것임을 역설한 말씀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서 그야말로 어변성룡의 참여와 실천을 요구한 말씀이다. 이 나라에 그 소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종사가 태어난 영광에 들어선 핵발전소와 정산종사 탄생지에 들어선 사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평화를 화두로 끊임없이 가파르게 출렁이는 이 나라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마땅히 대종사 교법을 신봉하는 우리들에게 어변성룡의 희망, 책임, 그리고 과제를 주신 것으로 이해한다. 평화라는 용으로 나아가기 위한 이 나라 물고기들의 몸부림 속에 원불교와 원불교의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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