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총부가 지어지기 시작할 무렵, 미국의 관심은 '같은 기계, 같은 노동력으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생산을 해낼까?'에 쏠려있었다. 이른바 '모던타임즈'의 시대다. 하버드대학에서 한 공장에 실험을 시작됐다. '환경이 밝으면 능률이 오를 것이다'는 가설로 조명을 밝혔더니, 진짜 생산이 많아졌다. 이번에는 반대로 어둡게 해봤다. 그런데 웬걸, 능률이 더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실험이 2년반으로 길어졌다. 이번에는 노동자들에게 조명을 어둡게 하겠다 말하고는 실제로는 그냥 유지했다. 노동자들은 조명이 어두워진 줄 알고 불만을 표했지만, 이상하게도 생산은 더 커졌다. 결국, 문제는 조명이 아니었다. 생산성을 좌우한 것은 바로 "하버드 대학에서 우리를 실험한대! 어떻게 해야 잘하는지 우리를 지켜본다는군!"이라는 노동자들의 마음이었다. 그 후로도 휴식시간을 늘려본다거나 기계의 배치를 바꿔본다거나 하는 실험들이 진행됐으나 결과는 가설과 달랐다. 이런저런 환경 변화보다는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노동자들의 기대가 능률을 올린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말 많고 비판 많은 이론이지만, 이 호손효과는 인간을 기계의 부속쯤으로 여기던 풍조를 바꿨다. 이렇게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지평이 열리고 속속 피그말리온효과, 로젠탈효과 등이 등장했다. 디테일은 다르지만 큰 맥락은 마음이 가장 큰 동기요, 능률이라는 것이다. 형체도 없는 '관심'이나 '기대'란 것이 공장을 돌리고 물건을 만들어냈다. 결국 답은 한때 풍미했던 유행어 그대로다. '지켜보고 있다' 연구팀이 조명을 조절한 것처럼, 지켜보는 이가 관심과 기대를 갖고 변화를 추구할 때 그 대상은 가장 크게 움직인다. 조직이나 목표가 정체되어 있을 때 흔히 지도층의 침묵을 비판하는 이유다.

그러니 흐름을 바꾸려면, 정체를 뚫고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지켜'보는 자가 반드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반대로, 그러한 액션이 나왔을 때 이에 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요, 자명한 도리다. 하물며 기업가-노동자 사이에도 그런 기대와 부응이 나오니, 더 크고 거룩한 대의에 합력한 우리라면 더욱 당연할 것이다. 나도 뭔가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요즘의 문화사회부나 최근의 원포털에게서 든다. 소극장을 찾아다니며 인연을 캐낸 '이 일을 어찌할꼬!'는 물론, 요즘 문화사회부, 페이스북, 카카오친구나 홈페이지, 각종 공모 및 이벤트 등 참 트렌디하고 부지런하다. 폭염 시즌에 맞춰 변신한 원포털도 말그대로 '핫'하다. 정말 고민을 많이 해서 낸 결과라는 게 곳곳에 보이니, 뭐라도 참여하고 글 하나라도 올리며 힘이 되고 싶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과란 없다. 변화에는 시행착오도 따를 테다. 지금은 노력과 성의에 박수를 보내자. 조명이 밝아지든 어두워지든, 기대와 관심은 결실로 화답받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춤출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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