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성 도무/원경고등학교
우리나라는 인성교육진흥법이라는 희귀한 법을 가지고 있다. 일부에선 폐기를 주장할 정도로 황당한 법이라고 하고, 일부에서는 입시교육으로 내몰린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교육이라고 한다. 그런데 바람직한 덕목을 제시하고 행동을 이끌어내는 형태의 인성교육은 사실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는 "사람의 성품이 정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다"(<대종경>성리품 2장)는 말씀, 성품에 바탕을 둔 공부법과 거리가 있고, 여러 교립 학교에서 시행하는 마음공부와도 많이 다르다.

<정전> 수행편 7장 무시선법에 선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대범, 선이라 함은 원래에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이다. 무시선과 무처선을 쉬운 말로 하면 '때 없는 마음공부, 어디나 선방'이라고 새기는데(<성가> 69장 표어의 노래), 여기서 마음공부는 선(禪)이라는 말의 현대식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대범, 마음공부(선)라 함은 원래에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인 바, 예로부터 큰 도에 뜻을 둔 사람으로서 마음공부(선)를 닦지 아니한 사람이 없나니라." 이 정의를 요약하면 마음공부는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이다. 그러므로 교당과 학교에서 하는 마음공부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자유로운 사람을 만드는 공부여야 한다.

마음의 자유는 마음의 구속을 전제로 한다. 왜 마음의 구속이 생기는가? 그것은 분별 주착을 하기 때문이다. 분별 주착에는 선악이 없다. 모든 분별 주착은 병통이다. 중국 선종 6조 혜능이 5조 홍인의 의발을 전수받고 남쪽으로 달아날 때, 그 의발을 빼앗으려고 따라잡은 혜명에게 혜능은 '불사선악(不思善惡)'과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매우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생각은 곧 분별 주착이다. 선에도 분별 주착을 놓고, 악에도 분별 주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선에 분별 주착하면 더 큰 악이 되는 건 흔한 일이다. 선의 명분 없이 일으키는 전쟁이 어디 있으랴. 본래면목이란 지위, 명예, 권력, 나이, 이념의 화장을 하기 전의 맨얼굴이며 성품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무언가에 분별 주착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오직 일류대학에만 분별 주착하는 부모는 자녀의 다채롭고 다양한 면모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세상의 대립과 갈등은 결국 분별 주착의 대립과 갈등이고, 각자의 맨얼굴을 잃어버린 데서 비롯되는 법. 마음공부는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이며, 마음의 자유는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는 것. 이러한 공부를 어찌 덕목 위주의 인성교육이 달성할 수 있겠는가. 날마다 달마다 분별 주착 덜어내기(일손월손日損月損), 화장 지우기, 맨얼굴 드러내기, 회광반조하기, 성품에 바탕을 둔 이러한 공부법이 진정한 인성교육이고, 우리가 공부하는 재미이며, 인생을 사는 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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