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출가를 권유 받고 고민하던 때이다. 추천교무님이 있는 교당에서 함께 지내며 교무란 무엇인지, 어떠한 일을 하는지, 겪어 보면서 나는 진지하게 못하겠다고 말했다. 내 눈에 비친 교무는 교도들을 상대하는 하나의 서비스업으로 비춰졌다.

낯가림이 심하고 붙임성도 없는 내게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다. 교화자로 살 자신이 없다고 하는 내게 추천교무님은 교무의 역할은 다양하다고 일러주며 나를 설득했고, 결국 나는 현재 교무의 길을 가고 있다. 물론 지금 역시 교화는 너무 힘들다. 처음에는 내가 왜 이렇게 아쉬운 소리 해가며 아이들 한 명 한 명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가. 법회가 보기 싫은 적도 많았다.

성향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즐겁고 기운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피곤함을 느끼고 휴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에 가까운 나는 교화가 때론 감정노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감정노동이란 실제로 느끼는 감정과 다른 감정을 표현해야 할 때 발생하며, 감정노동으로 생기는 부조화는 조직 구성원들을 힘들게 하고, 심한 경우엔 정신적 스트레스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는 비단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장과 가정생활 속에서 겪는 일일 것이다.

교화는 교무를 택한 내게는 교도를 상대하는 일이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자기 주변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교화의 형태일 것이고, 관계가 힘들면 감정노동에 시달리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요즘 나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관계 속에서 자유로워지고, 교화를 즐겁게 할 수 있을까?"이다.

청년이 다시 여쭙기를 "그러하오면 선생님께서는 어떠한 방법이라야 이 세상이 길이 잘 교화 되리라고 생각하시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나 오직 한 가지 예를 들어 말하리라. 가령, 큰 들 가운데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사 방법도 잘 알고 일도 또한 부지런히 하여 그 수확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우월하다면, 온 들안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자연히 본받아 갈 것이나, 만일 자기 농사에는 실적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로만 권한다면 그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은 물론이니, 그러므로 나는 늘 말하되 내가 먼저 행하는 것이 곧 남을 교화함이 된다 하노라.(하략)"(〈대종경〉 전망품 11장)

상대에게 무언가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왕 해주는 거면 잘해줘야 된다. 상대가 만족할 수 있도록. 그러기에 교화는 힘들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내 마음과 상대의 마음을 둘로 놓고 나는 주는 사람, 상대는 받는 사람으로 정해서 내 감정을 속이고 잘하려고만 하니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이어야 한다. 상대와 내 마음을 하나로 이어가며 그냥 그 마음대로 행하면 되는 것이다. 상대의 눈치 볼 것 없이 교법대로 행하는 그 마음이 모두의 한 마음으로 이어져서 서로 나투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교화는 되지 않을까. 둘이 아니기에 두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나는 그 순간 마음을 이은 우리는 하나다. 감정을 소비하는 노동이 아닌 감정을 나누는 행복한 일이 교화임을 알아서 그 일을 남 먼저 행하는 참다운 교화자가 되어야 하겠다.

/광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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