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명 교도/계룡·도곡교당
수많은 공부법 공유하는 노력 있어야
또 다른 형태의 절실함 필요한 때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시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확인하고 검증하고 있는 시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이젠 인간의 형상대로 새로운 인류를 혹은 새로운 존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바꿀 준비를 하고 있다.  그 형상이라는 것이 과연 외형적인 모습일까? 라는 의문에서 형상에 대한 해답을 '마음'에서 찾는다.

우리는 원불교를 마음공부 혹은 마음 쓰는 법을 공부하는 종교라고 이야기 한다. 궁극에는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을 어떻게 설명하고 정의하고 있는 것인가?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쓰면 행복한 것일까? 우리가 그 마음의 실체와 실행 알고리즘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인류의 출현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쉽고 편리하게 각자의 마음을 제대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 성불제중의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설명할 수 없다면, 마음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없다면, 마음이라는 개념을 그냥 폐기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유발 하라리의 권고를 심사숙고 해 봐야 한다.

오늘도 우리는 다양한 마음공부법을 이야기 하고 있다. 교당에는 교무님과 법동지들이 있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훈련원에서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이 교도들 뿐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마음공부법을 이야기하기 앞서 그 공부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하고 있는지, 그 공부법의 결과에 대해 평가하고 분석해 나가는 노력을 공유해야 한다. 교당에서는 어떻게 신앙과 수행의 생활을 문답하고 감정 받으며 서로 의지하고 이끌어 주고 있는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훈련원 프로그램이 개개인의 훈련 이력 이전에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물어보아야 할 때다.

어쩌면 우리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늘 이야기 한다. '각자의 근기와 경우를 따라 각각 그에 맞는 법으로 마음 기틀을 계발하는 공부가 어찌 저 고정한 경전만으로 하는 공부에 비할바 이리요' 라고 말씀하셨으니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반화된, 고정된 형태로 정의될 수 있는 마음은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누적된 수많은 공부법을 공유하고 분석하고 각자의 경험과 노력을 이야기해야 한다. 각자의 신앙과 수행을 문답하고 감정 받는 내용을, 꺼내기 부끄러운 소소한 감각감상의 결과물을 이제는 개인의 것으로 묻어두지 말고 이야기하고 데이터화 하자. 그 속에서 시대에 부합하는 공부법을 이야기하고, 개개인의 근기와 경우에 맞는 법으로 마음 기틀을 계발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진 시대를 앞서간 공부법이 지금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는 나 보다 나를 더 많이,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기술이 발전했다.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은 단순히 바둑이나 두기 위해, 엑스레이 영상에서 놓치기 쉬운 치명적인 질병을 진단하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 아니다. 그러한 기술은 벌써 수 십 년 전부터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메고 있는 마음의 실체와 사용법을 위해 우리와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는 중이다.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도 물질은 마음에 다가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종사님 말씀하신 정신개벽이 필요한 물질개벽을 이제야 우리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순한 기계 문명의 발전을 물질의 개벽으로 이야기하기엔 우리 시대가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멀리 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정신개벽을 이야기하며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물질개벽은 정신개벽에 훨씬 더 앞서 가고 있다.  실체 없는 마음을 알고리즘화 하기 위해 오늘도 새벽이 올 때까지 연구실의 불을 밝히는 과학자들과 전 세계를 동분서주하며 생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업가의 절실함이 우리보다 먼저 마음 설계도를 완성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또 다른 형태의 절실함이 필요한 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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