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내 몸에 배어 있는 것은 친절과 봉사다. 한의원이나 병원은 의사만 잘한다고 해서 모두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의사가 50이면 직원이나 간호사도 50을 채워야 한다. 의사만 잘하고 직원이나 간호사가 못하면 손님들은 "간호사 때문에 안 갈란다. 다른 병원 갈란다"하고 안 오는 경우를 여러 번 봤다. 똑같이 잘해야 한다. 그래서 최대한 친절하게 봉사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병원과 직장 이미지는 올라가게 돼 있다. 나는 내 신념으로 지금까지 실천하고 다닌다.

내가 살아오면서 좋지 않은 인연을 맺은 기억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역전보화당에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한 동료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관계가 틀어졌다. 그는 나보다 보화당에 먼저 왔었고, 익산 시내 길을 자전거 타고 다니며 가르쳐 주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 사람의 세정을 잘 알아주지 못했구나, 나만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역전보화당에서 이동할 때서야 느끼게 됐다.

보화당에서 거의 40여 년 생활을 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전부였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골 촌놈이 처음 익산에 왔던 일이나, 한약 배달 다녔던 일,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차량운행했던 일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윤산 김윤중 종사님은 내가 처음 보화당에 들어왔을 때 너무 많이 혼내곤 했다. 그 때는 서럽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잘하라고 그러셨던 것 같다. 그때는 역전보화당 사장이었던 정경훈 교무와 역전보화당에서 잤다. 법당은 이리보화당에 있는데, 새벽5시면 어김없이 보화당 직원들이 기도나 좌선을 했다. 일은 일대로 고되게 하고 또 아침에 가야하니까 꽤 힘든 생활이었다. 그때 윤산 종사께서 직원들이 지각하면 500원씩 벌금을 매셨기 때문에 함부로 빠질 수도 없었다. 그것도 지금 돌이켜보면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생활을 우리에게 길들여 주려고 그런 것 같다.

나는 '공부는 생활 속에서 영육 쌍전하고, 수양연구취사하는 표준을 삼아 득력하라'하신 법문을 받들고 산다. 비록 공부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책을 보고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 말씀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지금은 보화당 원장께서 직원들에게 경전을 보고 설명해 주시면 그것으로 조금씩 이해를 하는 단계에 있다.

그리고 매년 한번씩 보화당연합회를 통해 종법사님을 예방할 때가 있는데, 2~3년 전쯤 종법사께서 하신 법문이 크게 와 닿았던 적이 있다. 그것은 "하나를 가지고 정성들여 일심으로 궁글리고 연마하다보면 모든 것이 원활하게 통용될 것이다. 모르면서 여러 곳을 뒤적이다보면 혼란만 커진다"는 내용이었다. 왠지 알것 같았다.

나는 '안이비설신의 모든 것이 움직이는데 그 가운데 있는 그 한 물건을 가지고 공부하면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약을 짓다보면 약이 더 들어가거나 다른 약을 집어넣을 수 있다. 이 마음 하나를 잡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종법사님 말씀처럼 이것저것 두리번거리며 공부할 것이 아니라 핵심 하나를 정성들여 공부하면 나중에 문리가 터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6년 전에는 갑상선 수술을 하게 됐다. 몸이 갑자기 저하되고 당도 떨어졌다. 그래서 지금은 내 몸이 항상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조절하면서 '모든 것에 열정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다'는 평소 신념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제는 몸에도 잘 불공해야겠구나' 하면서 주말 오후에는 반드시 등산하고 있다. 일주일에 4번 정도는 내가 사는 아파트 17층까지 걸어올라다닌다.

평생 가지고 살았던 신조와 함께 몸도 더 챙기며 보은봉공에 정성을 다하겠다.

/이리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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