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차는 첫 서리가 내려야 주인공이 되는 차로 모든 차에는 재료의 특징과 효능이 있다. 특히 우리의 생활 속에서 약재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해왔던 약차는 전통 한약재에서 비롯된다. 우리 산하에서 채취한 한약재가 조선시대에는 어의에 의해 탕약으로 달여져 치료의 수단으로 이용됐다.

이러한 기록은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에서 방대한 자료로 존재한다. 특히 조선 왕실이 역사상 최고로 사용한 기록이 전한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 편찬에도 가장 기본적인 자료의 하나로 활용되었던 만큼 내용이 실록보다 훨씬 상세하고 풍부하지만, 자료가 너무 방대해 오히려 연구가 되고 있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 중 국화차는 숙종과 영조가 마셨던 것으로 추운 날씨에 왕이 체력이 떨어져서 오후가 될수록 피로가 심하게 느껴지거나 감기 후 허열이 뜰 때 회복시키는 용도로 사용됐다.

〈본초강목〉에 따르면 한의학적 효과가 두드러진 국화꽃은 맛이 쓰거나 단데, 단 것만을 약으로 쓴다. 국화는 머리에 생기는 모든 질병에 효과적이고 머리에 바람이 들어서 생기는 두통과 어지럼증을 치료하고 혈맥을 원활하게 해서 침침하거나 코가 막히는 것과 입맛이 없는 것 그리고 귀가 울리는 것 등에 효과가 있다.

국화차로 쓰이는 감국.

이러한 국화는 한의학적으로 간을 편하게 하며, 누적된 피로를 푸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어 임금의 피로 회복에 더없이 좋은 차였을 것이다. 비타민 A가 많아 시력회복에 좋고 비타민 C는 감기예방에 효과가 있는 국화는 첫 서리가 내리는 10월에 막 피기 시작한 꽃을 따서 대추, 감초 등 10여종의 약재를 달인 물에 살짝 데쳐 낸 후 덖으면 국화차가 완성된다. 그렇다고 모든 국화가 국화차로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차로 만들거나 약재로 쓰이는 감국은 지름 2.5㎝ 정도의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초와 달리 꽃술이 북실북실한 수입용 관상용 국화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문인 지식층에서 국화재배에 남다른 애정을 쏟아 화분에 길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특히 국화를 기르려면 48종은 되어야 한다는 정약용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강진에 귀양가 있던 정약용이 제자 인황상을 위해 써준, 은자의 이상적인 거처의 모습을 그린 〈제황상유인첩(題黃賞幽人帖)〉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뜰 앞에는 높이가 몇 자 가량 되는 울림벽을 하나 둘러둔다. 벽 안쪽에는 온갖 종류의 화분을 놓아둔다. 석류·치자 등을 각각 품격을 갖추어 마련하되, 국화를 가장 많이 갖추어야 한다. 모름지기 48종류는 되어야 겨우 구색을 갖추었다고 할 만하다"는 내용으로 정원의 풍경을 묘사한 글이다. 당시 서울의 부유한 집에서는 각종 기이한 품종의 국화를 구해 경쟁적으로 집을 장식했고 국화꽃 파는 소리가 온 거리 가득했다는 내용이 신위의 〈영국육절구(詠菊六絶句)〉에 등장한다.

예로부터 국화는 사군자인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중의 하나로 군자의 미덕을 잘 보여주는 꽃이기도 하다. 옛말에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여 풍채와 언변과 문장과 판단으로 사람의 인격을 논한다 하였으나,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판단이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직 그 사람의 마음이라 했다.

찬 서리에도 변함없이 은은한 향기를 발하는 국화는 마음으로 느끼는 향기가 저마다 다를 수 있으나 이 계절, 자연을 품은 국화향기 마시며 머리 맑히기를 권한다.

/원광디지털대학교 차문화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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